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샤프 위의 포뇨 May 11. 2019

오페라 인 시네마, <라 바야데르>

처음 만나는 러시아 발레


 지젤, 백조의 호수와 함께 고전 발레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라 바야데르>는 1999년 유니버설 발레단의 초연 이후 2000년대는 국립 발레단에서도 공연되었고, 작년에는 볼쇼이 수석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내한하면서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 발레를 '대중문화'라고 지칭하기는 애매하다. 티켓값도 만만치 않은 데다 사전 지식 없이는 내용을 파악하기도 어려워 발레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문화'쯤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교육할 정도로 발레를 보러 가는 것이 일상인 러시아와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발레를 접할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명 공연 실황을 담은 각종 DVD 및 블루레이가 발매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작은 모니터를 통해 공연을 보는 건 현장의 분위기를 호흡하기엔 역부족일뿐더러, 새로운 팬층을 끌어모으기도 힘들다. 그래서 2011년,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는 DVD 판매 대신 전 세계 22개국에 소재한 700개가 넘는 영화관에서 공연 실황을 상영하기로 결정했다. 수 천년 간 이어진 문화 장벽을 깨려는 각고의 노력은 기술의 발전과 만나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이제 한국에서도 롯데시네마의 '오페라 인 시네마'를 통해 일주일에 두 번씩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발레와 오페라를 즐길 수 있다.




롯데시네마에서 진행하는 오페라 인 시네마


 <라 바야데르>는 1877년 러시아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된 이후 아직도 전 세계 곳곳에서 상연될 정도로 명성이 높지만 지젤이나 백조의 호수에 비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뒤의 두 작품이 전형적인 서유럽 스타일의 발레라면, <라 바야데르>는 전형적인 러시아 스타일의 발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적 이게도, 러시아 발레의 정수라 불리는 <라 바야데르>의 안무는 러시아인이 아닌 프랑스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에 의해 창작되었다. 서유럽의 낭만발레가 표현력을 중시했던 것과는 달리, 뛰어난 무용수이자 안무가였던 마리우스 프티파는 아카데미적인 형식과 기교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테크닉을 과시하는 형식적 가치에 중심을 두었던 그는 평생 60여 편이 넘는 작품의 안무를 창작하며 러시아 발레의 대중화를 이끌었는데, 그중 라 바야데르는 가장 사랑받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지금이야 발레 하면 러시아를 떠올릴 정도로 러시아 발레의 명성이 높지만, 발레가 러시아에 정착하기까지는 무려 200년이 걸렸다. 17세기 서유럽 문화를 러시아에 정착하고자 했던 황제 안나 이바노브바는 프랑스의 유명 안무가를 초청하여 발레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그 결과 마린스키, 볼쇼이 등 유명 발레단이 문을 열었다. 마리우스 프티파도 이러한 시대 흐름에 따라 러시아로 건너가 그곳에서 러시아 발레의 명성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마리우스 프티파가 세상을 떠난 지는 벌써 10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 발레는 기술 중심의 고전 발레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앞서 언급한 마린스키와 볼쇼이는 물론 키로프 발레단의 무용수들도 높은 점프와 화려한 턴이 특징인 고전 발레를 주로 공연하는 반면, 서유럽에서는 표현력과 신체의 균형, 조화를 중시하는 컨템퍼러리 발레를 주로 공연한다.  


 이러한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동작은 '아라베스크(Arabesque)'다. 아라베스크는 한쪽 다리를 등 뒤로 뻗는 동작으로 발레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발레단은 아라베스크를 할 때 허리를 완전히 재껴 발이 머리에 닿기 일보 직전까지 다리를 높게 들지만,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무용수는 90도 이상 다리를 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 러시아 발레가 시원시원한 테크닉의 발레라면, 서유럽 발레는 우아한 표현력의 발레인 셈이다.

 

라 바야데르 중 니키야의 아라베스크


 <라 바야데르>는 분명 고전적인 '서양' 발레지만 독특하게도 인도가 배경이다. 카스트 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브라만은 아름다운 무희 니키야를 사랑하지만 니키야는 이미 용맹한 전사 솔로르와 사랑을 맹세한 사이다. 그러나 솔로르를 총애하는 왕, 라자는 공주인 감쟈티와 정략결혼을 종용하고 솔로르는 니키야의 사랑을 배신한다. 솔로르를 두고 벌이는 두 여성 캐릭터의 지독한 투쟁은 결국 니키야를 죽음으로 이끈다.


 사랑을 맹세한 무희와 전사. 그런 무희를 사랑하는 승려와 전사를 사랑하는 공주. 이미 드라마와 소설에서 지겹도록 보아와서 이제는 신물이 날 지경인 클리셰지만,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매료되고 만다. 인간의 DNA에는 사각 관계에 대한 흥미가 새겨져 있나 싶을 정도다. 휘몰아치듯 전개된 극은 잠시간의 인터미션 후 슬픔에 취한 솔로르를 비춘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마약에 손을 댄 솔로르는 환각 속에서 니키야와 재회한다. 비로소 <라 바야데르>의 백미인 '망령들의 왕국'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망령들의 왕국은 니키야와 솔로르의 재회를 축하하는 망령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주를 이룬다. 테크닉이 화려한 러시아 발레답게, 망령들의 왕국은 고난도 동작으로 발레리나들의 기피 대상 1호다. 그렇다면 발레에서 '테크닉이 어렵다'는 건 무슨 뜻일까? 흔히 다리를 들고 밸런스를 오랫동안 잡는다거나, 턴을 많이 돈다거나, 높은 점프를 자주하는 경우 테크닉이 어렵다고 한다. 라 바야데르는 이러한 고급 동작들이 다른 작품에 비해 유독 많다. 그중에서도 라 바야데르의 2막, 망령들의 왕국은 속된 말로, 테크닉의 끝판왕이다.


망령들의 왕국 코르 드 발레


 망령들의 왕국에서 등장하는 솔리스트의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코르 드 발레(솔로를 추지 않는 무용수를 일컫는 말로 군무를 의미)의 난이도 또한 만만치 않다. 망령들의 왕국에서는 앞서 언급한 아라베스크 동작이 무려 38번이나 반복되기 때문이다. 평지에서도 쉽지 않은 동작을 가파른 언덕에서 서른 번이 넘도록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의 능력에 무한한 감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32명의 무용수 중 누구 하나 먼저 다리를 떨어뜨리는 이 없이, 순백의 망령들은 달을 벗 삼아 군무를 선보인다. 발레 애호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안무다운 화려함이다. 




 삶의 질이 높아짐에 따라 문화생활은 이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사치재가 아닌 필수재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의 재분배뿐 아니라 문화의 재분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로지 유럽 귀족들의 문화였던 발레는 국가와 계급의 장벽을 넘고 마침내 대중문화의 토양에 스며들 준비를 마쳤다. 당장 나조차도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발레 공연을 영화관에서 편하게 접했으니, 21세기를 사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기술을 이용한 문화의 재분배는 이제 막 첫 발을 디뎠다. 앞으로 오페라 인 시네마가 문화의 재분배에 얼마나 기여할 지, 그 가능성이 기대된다.


원문 출처: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1638



 

작가의 이전글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