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아이디어는 누가 다 먹었을까
몬스터 주식회사, 라따뚜이, 니모를 찾아서, 업, 월E…….
2000년대를 주름잡던 픽사의 영화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남아 있다. 그들의 기발한 상상력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창의성이었으며, 픽사 역시 이러한 창의성을 회사의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여겼다.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하면서 세계 유일의 창의성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디즈니는 겨울왕국으로 2012년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러나 올해 디즈니(와 픽사)의 행보는 그들의 창의성에 의문이 들 만큼 실망스럽다. 다큐멘터리인 펭귄, 단 한 편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기존 작품의 속편이거나 리부트기 때문이다(Artemis Fowl의 경우 2020년으로 개봉이 미뤄졌다). 물론 속편을 제작하는 것 또한 많은 창의성을 요하는 작업임은 분명하지만, 기존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답습한다는 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더욱이 20세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실사화시킨 작품이 전체 개봉작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 약간의 각색이 가미된다고 하더라도 등장인물과 주요 줄거리에는 새로움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디즈니만의 문제도, 2019년 만의 문제도 아니다. 86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박스오피스 1위 작들을 살펴보면, 86년부터 2001년까지 16개의 작품 중 기존 작품의 속편이나 리부트인 경우는 4편에 불과하지만, 2002년부터 2018년까지 1위 작 중 속편이나 리부트가 아닌 경우가 2편에 불과하다(겨울왕국, 아바타). 2001년 이전 속편이나 리부트가 아니었던 작품 중에도 무려 7편이 흥행에 힘입어 속편이나 리부트가 제작되었고, 그중 세 작품이 올해 디즈니 개봉작 라인업에 올라와 있다(알라딘, 토이스토리, 라이온 킹).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에는 '2019 가장 기대되는 영화 68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와 있다. 손수 세어 본 결과, 이 중 기존 작품의 리부트나 속편인 영화는 무려 32편이나 됐고, 세계 최대 영화 데이터베이스인 IMDB에 올라온 '2019 가장 기대되는 영화 10편' 중에선 8편이 속편이나 리부트였다. 이마저도 캡틴 마블이나 샤잠, 포켓몬 등은 제외한 결과다.
2019 현재까지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부터 10위 중 6편이 속편 및 리부트고, 나머지 4편 중 세 편이 포켓몬, 샤잠, 캡틴 마블인 것을 고려하면 순수한 창작 작품은 'US'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니까, 2019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의 대부분이 할리우드 전성기에 인기 있던 영화들을 좀 더 깔끔한 화질과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한 복제품인 것이다.
위의 사이트들이 못 미덥다면 좀 더 객관적인 통계치를 가져와도 좋다. 05년부터 17년까지 수익 상위 100편의 영화를 분석한 결과, 2017년 속편의 비율은 2005년에 비해 3배나 오르며 거의 30퍼센트를 차지했다. 리부트의 비율은 2005년에 비해 4분의 1로 떨어졌지만, 2005-6년에 리부트 비율이 심각하게 높았던 것일 뿐, 2007년부터는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더 자세한 통계 결과가 궁금하다면 아래 사이트를 방문하면 된다.
https://stephenfollows.com/the-prevalence-of-sequels-remakes-and-original-movies/
속편 및 리부트 영화들은 거대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기 때문에 언론 노출 빈도가 높아 그 수가 많아 보이는 것뿐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다. 제작비의 한계 때문에 개봉되는 영화의 대부분은 저예산 영화인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저예산 영화의 속편을 제작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독과점 산업일 수밖에 없는 영화산업에서 전체 개봉 영화 중 비율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철저히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할리우드에서 수익성이 좋은 속편 및 리부트를 내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의견도 있다. 라라 랜드나 문라이트가 아무리 훌륭한 평을 받아도 어벤저스의 발끝만큼도 수익을 내지 못하는 데다 오히려 오리지널 작품이 속편 및 리부트 영화보다 리스크가 크고 좋은 평을 받는 경우도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소비자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는 아둔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할리우드의 수익성을 저해한다.
기업의 입장에서 리스크를 줄이려는 시도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삼성이 스마트폰을 개발하기 위해 투자하는 대신 기존에 잘 팔리던 폴더 폰이나 슬라이드 폰만을 생산했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삼성이 애플과 견주는 기업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영화 산업 자체는 독과점 형태를 띠고 있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는 얼마든지 다른 오락거리(게임, TV쇼, 드물지만 책 등)로 대체될 수 있다. 달리 말해, 영화의 전반적인 질이 떨어지면 여가에 영화 대신 선택할 대체재가 풍부하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 개발에 힘쓰는 대신 기존의 흥행공식만을 답습하려는 안일한 태도는 영화 산업 전체의 발전은 물론 개별 회사의 수익성도 저해한다.
지금 당장 리부트나 속편을 제작할만한 영화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문제도 있다. 이미 80년대 흥행 상위 15편의 영화 중 리부트 및 속편이 제작되지 않은 영화는 단 세 편뿐이다(ET, 투씨, 레인맨).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화사에선 이미 개봉한 지 30년도 더 지난 영화의 속편을 제작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82년 개봉작 블레이드 러너는 2017년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로 돌아왔고, 86년 최고 히트작 '탑건'은 33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50대가 되어 버린 톰 크루즈를 주인공으로 속편을 제작 중이다. 90년대로 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96년 작 인디펜던스 데이는 2016년 속편을 개봉했고, 93년작 쥐라기 공원은 2015년 쥐라기 월드로 리메이크되었다. 마치 빠른 속도로 석유가 고갈되듯이, 속편 및 리부트를 제작할 영화도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속편 및 리부트 영화들이 흥행성적은 좋을지언정 좋은 평을 받은 적은 드물다는 데 있다. 과거의 향수 때문이든,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든, 속편 및 리부트 영화들의 흥행 성적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재작년부터 죽 이어져 온 디즈니의 실사 작품은 모두 '그저 그렇다'는 평에 그치고 말았다. 드물게 호평을 받은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국내외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인디펜던스 데이, 스타워즈, 쥐라기 월드 모두 마찬가지다. 화려한 CGI와 완벽하게 구현된 동화 속 세상도 물론 좋지만, 영화가 단순히 이것에 그쳐서는 좋은 평을 받을 수 없다.
관객들은, 처음으로 스크린 위에 구현된 공룡을 봤을 때의 공포와 처음으로 귀를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아기 코끼리를 봤을 때의 충격을 원한다. 관객들은, 거대 로봇으로 변하는 자동차 모양의 외계인과 우주를 누비며 은하계 공주를 구하는 건달에게 열광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그 소재가 새롭게 느껴질 때만 해당하는 얘기다. 아무리 '겨울왕국'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빅 히어로 6', '주토피아', '주먹왕 랄프' 대신, 겨울왕국 2, 겨울왕국 3, 겨울왕국 4, 겨울왕국 스핀오프: 안나의 이야기, 겨울왕국 스핀오프의 스핀오프: 올라프의 이야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8-90년대 넘쳐나던 아이디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태초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관객이 원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할리우드에는 우리를 웃고, 울고, 놀랍게 할 멋진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다만 공중파 방송국과 대기업 영화사 대신, 케이블 채널과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관객들을 애타게 찾고 있을 뿐이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로마>가 수상한 것을 두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를 제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국내에서도 이를 두고 몇몇 사이트에서 설전이 벌어졌는데, 아카데미 시상식이 넷플릭스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훌륭한 작품이 단순히 플랫폼의 차이로 시상식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개인적으로는 양쪽 모두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최근의 할리우드를 보면 넷플릭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속편 영화의 비율이 30퍼센트에 육박하고,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비율은 50퍼센트에 달하는 할리우드에서 이제 과거의 참신한 충격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넷플릭스는 단순히 한두 달 간의 관람객으로 흥행을 점치지 않기 때문에, 할리우드 주류에서 외면받고 멸시받던 아이디어도 기꺼이 제작해 주는 편이다. 물론, 실험적인 작품이 많아 우스갯소리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는 걸러라'는 말도 있지만, 반대로 '밴더스내치'나 '러브, 섹스, 로봇', '카우보이의 노래' 등 번뜩이는 재치로 할리우드의 밝은 미래에 힘이 되어주는 작품도 많다.
평소라면 보기 힘들었을 동양인, 히스패닉,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의 비율도 높은 것도 넷플릭스만의 장점이다. 백인 유대계 남성이 힘을 쥐고 있는 할리우드에서 미국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넷플릭스만의 작품들은 반복되는 클리셰에 지친 관객의 갈증을 해소하기에 적절하다. 아직 한국에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넷플릭스 이외에도 왕좌의 게임으로 유명한 HBO, 아마존 스트리밍 서비스 등이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할리우드의 자기 복제의 답이 넷플릭스라는 것이 아니다. 무작정 주요 영화사들을 비난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혁신을 무기로 빠르게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의 위협에, 할리우드가 다시 한번 반짝이는 아이디어의 각축장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인류는 과거를 반추하며 성장하지만, 성공의 열쇠는 언제나 미래에 있다. 그러나 이런 글을 쓰면서도 마음 한 편이 찝찝하다. 매번 실망하는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이 알라딘과 맨인블랙과 라이온 킹을 향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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