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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ungoo Mar 12. 2024

그림쟁이의 남편 - 04

공간의 실현

나는 비정규직이다. 계약직이라고도 한다. 예상컨대 3년 정도는 더 일할 수 있을 가능성은 꽤 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앞날을 딱히 걱정하는 성향도 아니므로 그 어떤 대비책이 있을 리 만무하다. 무슨 연유인지 갑작스레, 내가 아내를 지원할 수 있는 기간이 평생 중 딱 3년 남은 게 아닌지 심각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한 답지 않은 조바심을 감지했을 때는 신선한 기분마저 들었다. 웬만해선 걱정을 하지 않는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들 수 있다는 사실에 인간미를 느낄 정도였다. 아내의 집중을 위해서 작업 공간을 마련하는 일에 대해서는 진즉부터 생각했고, 심지어 로또에 걸리면 무엇을 할지 고민하듯 있지도 않은 작업실을 어떻게 활용할지 상상력을 발휘한 시간도 적지 않았다. 덤이라는 명목의 나를 위한, 아늑한 독서 공간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리사욕을 우선하고도 남전형적인 한국의 외동아들이다.


모처럼 생긴 조바심을 놓칠세라 아내에게 3년을 강조하며 상당히 논리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나의 월급으로 당신을 지원할 수 있는 거의 확실한 기간은 앞으로 고작 3년이다. 내가 백수가 되기 전에 우리는 일을 벌여야 하고,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했다. 당연히 이런 설득에 납득하지 않기란 여간해선 불가능하다. 우리는 위치와 월세가 적당한 매물을 찾기 위해 N사의 부동산 지도를 살펴보았다. 가본 적 있는 작은 카페 자리가 눈에 띄어 그곳의 권리금, 보증금, 월세를 확인해 보았다. 바로 그 액수들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토의했으며, 세상물정 모르는 순수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만큼 제시된 금액에 수긍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곳이 우리의 공간이 되려고 일이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야,라는 근거 없는 샤머니즘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런 경우라면 열이면 열 그 믿음에서 빠져나올 방안은 거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우리는 어떠한 협상안도 제기하지 않고 그곳을 계약하였다. 그리고는 계약에 관한 심도 있는 평가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내는 우선 작업실 내부의 모습들을 그려보고자 하였다. 실내 또는 정물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집중하는 아내를 보니, 일을 벌이길 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덤으로 나에게도 작은 독서 공간이 생겼는데, 드물게 스스로의 결정에 칭찬까지 할 참이었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아내에게 그와 비슷한 수준의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길 바란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언제까지 내가 지원해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러운 예측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년이라는 예측불가능한 시간제한이 만들어낸 조바심은 그저 하루속히 작업실을 장만하기 위한 핑계로서 그 역할을 잘 수행했다.

 

코너와 선반이 있는 정물 (캔버스에 유화)


작업실이 위치한, 주택가 골목의 실정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작업실 입구에 버젓이 주차를 해대는 것이다. 이전에 골목길을 산책할 때 이런 사건은 나와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단지 구경꾼으로써 무분별한 갓길 주차가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의견을 마음으로 속삭였을 뿐이다. 애초에 계획성 없이 형성된 우리 도시는 미관을 우선할 여력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런 골목길의 어느 한 귀퉁이에 우리와의 직접적 연관성이 부여된 후부터 구경꾼 업무는 끝나버린 것이다.


우리는 약간의 부차적 문제들을 겪었으나 점점 그러려니 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다. 신경 끄기의 기술을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할 일에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시민들은 상가 앞에 버젓이 주차를 하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거나 전화번호를 남기는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으로 말끔히 분할된 차가운 아파트 생활에 물들어 잊고 있던, 우리의 골목길은 시민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정감 있고 활기찬 곳임을 새삼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향수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곳에 40대 시절 한때의 추억이 깃들 예정이며, 그 일은 특별히 유별난 계획도 없이 진행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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