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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ungoo Apr 02. 2024

그림쟁이의 남편 - 06

다름의 다채로움

아내가 MBTI 검사를 해보라 했다. 하여튼 인간을 탐구하는 일이라면 아내는 환장하는 것이다. 나는 ISTP, 아내는 ENFP였다. 세 가지가 다르게 나왔다. 우리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은 함께한 세월이 쉬지 않고 알려주었기에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처럼 제시된 이 과학적 근거를 등한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기억을 탐험하고 분석하다 보면 서로가 다름으로써 비롯된, 당시에는 이유도 모른 채 흘려보내 영영 만나지 못할 뻔했던, 어떤 깨달음과 돌연 재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아가, 이토록 다른 성향의 조합으로 말미암은 긍정적 시너지를 우리 삶에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 쓸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긍정적 마인드로 해보자 하니, 그래봐야 희망고문일 뿐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아내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최악의 상황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버릇이 강하니, 매사가 온갖 의심과 불신으로부터 시작된다. 동시에 대개의 경우 나에게 화를 낸다. 타고난 한량이라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하는 데다 걱정조차 없으니 속이 터진단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 나는 대꾸하지 않는다. 다투는 듯한 이 현장에 우리의 시너지가 발동하고 있음을 눈치챘는가. 극단적인 긍정 또는 부정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을 방지하기 위해 무의식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겠다. 서로를 견제함으로써 중심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모를 뿐.


아내는 인기쟁이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미소와 배려의 아이콘이다. 본인이 불편해 죽을지언정 남의 불편은 도무지 내버려 두질 못한다. 아내만 옆에 있다면 나의 지독한 낯가림조차 묻혀 버리는 마법이 일어나니, 나는 아내가 있어 든든하다. 그런 미소와 배려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임에도 아내는 왜 그럴까. 천사 같은 모습은 일종의 테스트인 셈이다. 자신의 배려를 지뢰처럼 깔아 두고 상대의 피드백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세 번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진다. 선을 넘는 행동이 세 번째가 되면, 아내는 속으로 '당신과는 이제 영원히 안녕입니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 어려운 심사과정(지뢰밭)에서 살아남아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가, 여전히 의문이다. 사람에 대한 의심을 거의 모르고 살던 내게 아내는 인간세상의 여러 민낯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런 면에서 아내는 나의 스승과도 같다.


아내는 매우 엄격하다, 타인보다 본인에게 더 그렇다. 페트병이나 플라스틱 용기의 잔여 접착제까지 철저히 제거한다. 종이박스에 붙은 테이프와 스티커는 반드시 제거한다. 모든 종류의 봉지는 반드시 깨끗이 헹군 후 말린다. 이 모든 행위는 오로지 재활용률을 고려한 행위들이다.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하니, 우리 인간이 누리는 편리함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고 한다. 나는 이 올곧은 사람에게 어떠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지극히 타당할 뿐만 아니라 좋은 취지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나 역시 그 "올바르고 제대로 된" 분리수거에 동참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아내가 옆에 있으면 더 열심히 한다. 이처럼 아내는 나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운 좋게도 찰나와 같은 순간을 지구에 머무를 기회를 얻은 행운아일 뿐이니까. 


우리의 몇 가지 다른 성향에 대한 일례들을 되짚어보았다. 서로 다름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일 뿐이니, 각자의 성향에 잘잘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르기에 관심과 호기심이 생긴다. 가령 우리의 귀여운 반려견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너무 궁금해질 수 있다. 개는 노란색과 파란색만 볼 수 있다는데,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런 호기심으로부터 우리는 반려견을 더욱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한층 더 공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물며 우리의 반려견들도 그런 노력을 한다. 플러시!(버지니아 울프 저)는 주인인 배럿 양처럼 손을 쓰고 말을 하고 글을 읽거나 쓸 수 있길 바랐다, 플러시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쪼롱이의 콜로세움 여행 (캔버스에 유화)


정리하다 보니, 우리의 조합은 내게만 유리한 듯 보인다. 정말 그렇다. 아내에 비해 나의 기여도는 낡은 니트의 보풀정도에 불과하다. 보풀제거기도 열심히 일하다 보면 작고 귀여운 털뭉치를 생산해 내지 않는가. 잠시 그림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그림에 관해 지식도 재능도 없지만 아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마치 공동의 일인 양 인식하고자 했다. 그것이 직접적 도움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너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안도감. 너의 일이 나의 일 따위나 그 무엇보다 가치 있다는 확신.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그 비슷한 말이나 위로뿐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지식을 요구하며 또 그것을 응용하고 실현하기 위한 탐구와 실험을 반복하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모되므로 나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어려운 일이란 사실만 나는 명확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공동의 일인 듯 인식하여 공감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MBTI 7개 성향을 가진 셈이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에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전장이 분명 있었고, 지금도 그 안에 있을지 모른다. 서로가 뿌리부터 다른 성향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니 그 전투들이 조금은 납득되기 시작한 것 같다. 타인에의 배려심, 본인에의 엄격함,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진 아내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이런 아내가 나를 조금이나마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뜬금없이 주체하지 못하는 눈물과 언제든 파도치는 감정선이 또 다른 아내를 말해준다. 그 옆에 고목나무처럼 서있는 나는 딱히 해줄 것이 없다. 그저 아내가 가지지 못한 성향을 나로 하여금 그녀가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그 옆에 서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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