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래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돌고래가 떠올라. 초음파 영역에서 대화하는 돌고래처럼, 그는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보는 타고난 감각이 있었던 게 아닐까. 램브란트 초상화의 피부에서 수많은 색들을 발견했을 때 아내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램브란트는 색을 보는 타고난 육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왜 자신에게는 그게 보이지 않냐고 했다.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과연 램브란트가 돌고래였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거의 즉시 그럴 리 없다고 결론지었다. 램브란트의 초상화가 다른 화가의 그것과는 달라도 뭔가 다름은 명백한 사실인 듯하다. 다만 무엇 때문에 다르게 보이는지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내에게 적합한 조언을 해줘야 할 것 같은 상황극은 이런 식으로 돌연 시작된다.
정말 솔직한 나의 본성대로 아내에게 반문하자면 이런 말들이 나올 수도 있다. 돌고래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고민해.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고 있으면 실력이 느니? 우리의 대부분은 어차피 애매한 재능을 가진 것뿐이야. 너라고 뭐 다를 줄 아니? 네가 램브란트 초상화 앞에서 좌절하는 건 그의 노력을 폄하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정말 타고난 능력만으로 하루아침에 저런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미친 거 아니니?라고 말이다. 글로나마 이렇게 나의 본성에 맡긴 의사표현을 하고 나니 시원하긴 하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못하다.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함은 물론이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게다가 이혼을 당할 수 있다. 하여, 비슷한 의미를 담으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 방식의 절묘한 말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 나의 과제이다.(에휴)
애매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우연히 그럴싸한 성과를 낼 경우, 심각한 착각에 빠지기 일쑤다. 가령 학창 시절 그림이나 글 따위에 재능이 조금 있다고 자각한 상태에서, 얄궂은 상장이나 괜찮은 성적을 받게 되는 경험은 오히려 독이 될만하다. 자칫 본인의 특별함에 스스로 도취되어 그것이 내면 깊이 깔리면, 우와!, 그것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지 싶다. 그렇기에 어설픈 영재교육 따위는 지양해야 마땅하며,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특별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만 괜히 본인에게 실망하여 좌절하지 않고 필요한 노력을 통해 정진할 수 있으며, 같은 맥락으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역시도 그저 평범할 뿐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램브란트는 과연 타고난 그림의 천재인가? 신인가? 이러한 접근은 배움의 의지를 꺾을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인생과 노력을 봐야 하고, 그의 깨달음을 뒤쫓아야 한다.
*애매한 재능, 수미 저 (어떤책)
**신경 끄기의 기술, 마크 맨슨 저 (갤리온)
러시아 레핀미술대학의 교수였던 변월룡은 램브란트를 가장 존경했으며, 데생의 중요함을 무엇보다 강조하였다.* 또한, "내 화실에 문패를 단다면 나는 ‘데생 교실’이라고 내걸 테다.**"라고 앵그르는 말한다. 예술가가 남긴 한마디는 어찌나 소중한가. 그 말은 내게는 이렇게 들린다. 색에만 현혹된 과장되고 줏대도 없는, 그리하여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그런 그림을 그릴 바에야 다시 데생에 집중하는 편이 백번 나으리라.
*변월룡, 문영대 저 (인그라픽스)
**앵그르의 예술한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저 (북노마드)
지금 그림을 독학하는 사람이라면 그 근본에 깔려있는 전체적인 명암의 정교함, 또는 명암의 지배적인 역할 등의 본질적인 과제에 집중해야만 한다. 돌고래가 떠오르는, 겉보기에 다채롭고 세밀한 표현들은 그야말로 램브란트의 독자적인 개성이라고 인식하는 편이 좋겠다, 또는 감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불현듯 다가온 낯선 돌고래는 아내를 새로운 공부법으로 인도했다. 사용하는 물감(튜브) 개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는 다양한 Color harmony에 대한 실험인 동시에 명암 조절에 더 집중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사용할 튜브색을 3-4개로 정해놓고 그림을 완성하는 단순한 방식이다. 화방에 색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들의 유혹을 밀어내기란 이토록 쉽지 않다. 이후 아내는 한결 마음이 편해 보이고,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아내는 그간 눈에 띄는 색들에 취해 있었노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렇게 아내의 험난한 독학 여정은 어떻게든 이어진다, 언젠가 자신만의 돌고래와 만나길 고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