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nungoo Apr 30. 2024

그림쟁이의 남편 - 08

갑자기 분위기 부조리

글을 쓰려고 앉았다. 작정하고 덤볐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작정을 너무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못했다. 여기서 알게 된 것. 쓰기 위해 앉아봐야 별 소용없다는 사실. 이건 직업이 아니다. 요즘 브런치에 글을 뜸하게 올리고 있다는 부끄러움. 초기의 자신만만했던 포부는 급하게 뜨거워진 만큼 빨리도 식는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뾰족한 흥분보다는 완만한 평정심이 옳다는 사실. 인생에 걸쳐 꾸준한 재미를 보장하는 게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늘 그것이 문제로다. 여태 꿈도 없이 그냥 살았다. 꿈이 없다는 게 사실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그 엇비슷한 무언가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가. 뭐야, 근데 이런 쓸데없는 글을 적으면서 조금씩 재밌어하는 자신을 느낀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이 행동이 쓸데없지 않았단 말인가. 세상은 쓸데 있는 일들이 이미 가득 차서 그런지, 도통 그런 일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림만 해도 그렇다. 그건 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관심이 간다. 책도 마찬가지, 특히 문학은 나와 어울리지도 않아 보인다. 그런데 관심이 그나마 조금 간다. 뭐야, 나 원래 문과 감성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지. 나의 진학 과정에 나의 의지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남자니까 이과, 남자니까 공대, 취직하려면 공대, 사실 그뿐이었다. 고3시절 담임선생님은 내게 조금 고마워하신 듯했다. 거의 꼴찌나 하던 놈이 그래도 대학에 가줬으니. 그건 선생님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아니었는데. 아무튼 다행이네요, 선생님.


뭐야, 벌써 10줄도 넘게 적었잖아. 글을 쓰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잘 쓰는 거, 스스로 만족할 만큼 잘 쓰는 게 어려울 뿐이다. 근데 또 너무 잘 쓰려고 하면 문제다. 솔직히 네가 잘 쓴다는 기준이 뭔지나 아니? 자신에게 이렇게 반문해 보니, 음, 그렇군. 대답도 못한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아내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근데 그건 아마 최종 목표는 아니다. 본인 그림을 그리기 전에 우선 표현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말 같다. 분명 좋은 취지고 틀리지 않은 말이다. 그래, 너라도 열심히 해야지. 우리는 대개의 경우 같이 출근을 한다. 나의 직장과 아내의 작업실이 근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차도 없다. 버스나 지하철 또는 걸어 다닌다. 조금 전 아내는 내가 너무 뭉그적거린다고 혼자 가버렸다. 화장실에서 나와보니 가고 없다. 뭐지 이 열정은? 저렇게 빨리 작업실로 가고 싶은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어제 끝내지 못한 작업실 정리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 아내 주변은 평소 난장판인데 이상하게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 그게 아니라면 빨리 무언가를 그리고 싶어서 일수도 있다. 뭐가 됐든 구리만큼 빨리 뜨거워지는 열정이 아내를 혼자 가도록 만들었다. 나는 홀로 남은 김에 이렇게 글을 적는다. 뭐야, 집중이 잘되잖아. 이거 좋은데, 따로 다니는 거 말이야. 


위의 단락까지 맞춤법 검사를 해보니 틀린 곳이 20군데가 넘었다. 한글은 결코 쉽지 않다. 여기서 또 재밌는 사실. 아내는 의외로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강하여 곧잘 내 글을 지적한다. 나의 교열걸인가. 


쪼롱이의 루틴 (캔버스에 유화) - 며칠이 지난듯한 느낌에 어울리는 그림


며칠이 지났다. 다시 더 적어보고자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생각이 없다. 사실은 약간의 압박이다. 매번 그럴싸한 내용을 짜내야 하고, 그 내용과 연관될법한 그림과 책인용까지 넣으려니, 실상은 억지이다. 아내가 그려놓은 아무런 그림을 넣고, 대충 책인용을 끼워 넣는다. 여기서 문제.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게 아니니 입맛에 딱 맞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발주할 권리도 없다. 책은 내가 읽는 것이지만, 맥락이란 게 있으니 아무 책이나 인용할 수는 없겠지. 예를 들어 어제는 '인형의 집'(헨리크 입센)을 읽었다. 길지 않은 희곡이라서 천천히 토요일 하루동안 다 읽었다. 이 글에서 '인형의 집'을 인용할 대목이 존재할리 있겠는가. 뜬금없이, 남편의 인형처럼 살던 주인공 노라가 부조리를 깨우치고 독립을 결심하게 되는 이야기에 대해서 장황하게 늘어놓을 순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뭔가 그와 관련된 그림이 있었는지 찾아보겠지. 그래, 이걸로 어떻게든 퉁치자는 생각에 적당한 그림을 넣을 수도 있을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도 많은 부조리를 겪으며 살아간다. 여태 차도 없어? 아이는 언제 낳을 거니? 그림 그려서 어떻게 먹고사니?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아이는 생기면 낳겠죠. 그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라고 똑같은 대답을 많이도 했다. 그리하여 이번 글의 제목이 떠올랐다. 갑자기 분위기 부조리.

작가의 이전글 그림쟁이의 남편 - 0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