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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ungoo May 09. 2024

그림쟁이의 남편 - 09

적절하고 낯선 고독의 저녁

혼자 돼지국밥을 먹기로 했다. 동네에 있는 '명가돼지국밥'은 혼밥 좌석이 구비되어 있어 혼자 가기에 적당하다. 깔끔하니 맛도 좋은데, 가격이 8천 원이니 요즘 같은 물가에는 고마울 따름이다. 부글부글 끓는 뚝배기가 나오면 즉시 부추와 소면을 넣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다. 후루룩 한입에 소면을 다 털어 넣어 입가심하고, 깍두기나 배추김치를 곁들여 국밥을 먹기 시작한다. 한입씩 뜨는 매 순간 국밥이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하며, 역시 부산의 소울푸드군! 감탄하다 어느새 식사를 마친다. 


밖으로 나오니 오후 7시 30분 즈음이다. 오늘의 일몰시간이 7시 15분이었으니 벌써 해는 저물었다. 그럼에도 제법 밝았다. 음, 해가 많이 길어졌네..라고 관용적인 혼잣말을 하려다, 벌써 5월이고 여름이 코앞이란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조금 싸늘한 저녁의 온도가 그간 내가 알던 5월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 낯설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름이 많지 않은 오늘의 하늘은 더 깨끗해 보였다. 왼쪽 하늘을 보니 산등성이에 가까이 갈수록 옅은 보라색과 분홍색이 섞여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또한, 반대편의 오른쪽 하늘은 청명한 짙은 파란색으로 뒤덮여 차분했다. 천변 산책로의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신비한 보라색 하늘에 이끌려 왼쪽길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왠지 그 오묘한 보라색 하늘을 확연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천변길을 따라 심어놓은 거대한 벚나무들은 어느새 풍성한 잎들로 가득 차 산책로에 두터운 천정을 만들어 놓았다. 하늘을 가린 무수한 잎들 사이의 수많은 틈(Sky holes)으로 여전히 그 하늘색들은 스며들었고 웅장한 자연의 천정과 어우러져 예상밖의 장관을 이루었다. 


너무도 황홀한 기분에 휩싸여 정신없이 길을 걷던 중 천변 농구장의 대낮 같은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조명을 비추어 운동하기에 지장이 없었고 시합을 하거나 연습 중인 젊은 사람들의 활기가 느껴졌다. 그 농구장을 멀리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중간지점까지 걸어가 농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슛을 쏘거나 격렬하게 수비하는 동작을 사진으로 찍으며, 이런 동적인 모습들을 아내는 특히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원래 목적이었던 보라색 하늘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니 이미 그 오묘한 색들은 옅은 파란색으로 변해있었다. 오후 8시 즈음이었다. 사실 천변으로 가고자 결심했을 당시에는 근처의 카페에서 책을 좀 보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충만감에 더 이상 그러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멋진 노을의 시간이 끝나자, 오늘의 파티가 완전히 끝난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는 길에 과자와 음료수를 사가면, 책을 읽을 때 유용하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게 되었다.


공존 (캔버스에 유화) - 우리는 이 그림을 밤표범이라 부른다.


돌아가는 길, 슈퍼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오늘의 체험을 글로 적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저녁을 먹고, 멋진 노을 속의 천변을 걷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대략 1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싶었다.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한 이후로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 듯하다. 농구장을 한참 바라보다 시간을 확인했을 때 고작 30분이 지났을 뿐이라는 사실에 놀라웠을 정도였는데, 보라색 황홀경 속에서 매우 긴 산책을 한 듯 착각했던 것이다. 왜 자주 이러한 시간들을, 그런 노을과 주변들을 더 자세히 바라보지 못했는지,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 다름 아닌 오늘과 같은 평범한 찬란함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에게 이런 날이, 우리에게 이런 날이 충분히 남아있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인지, 그렇게 안심해도 괜찮은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런 생각에 도달하자 조르바(그리스인 조르바)의 마지막이 문득 떠올랐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창문가로 걸어가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며 웃다가 곧 울었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조르바. 매일의 하늘과 풍경을 늘 처음 보는 경이인 듯 감탄하던 조르바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먼 산을 보며 웃었고, 그것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에 그렇게도 울었던 것이 아닐까.


잠시 후 아내가 귀가했다. 아내는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슬쩍 방으로 들어왔다. 책을 보던 나는 애써 눈을 마주치기를 피했지만 주변시로 느껴지는 아내의 얼굴에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렇다. 우리는 약간의 다툼으로 어색한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경험을 굳이 아내에게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처럼의 적절한 고독감과 어여쁜 하늘빛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오늘의 감상이란, 도대체 말로는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오늘 느낀 5월의 싸늘함은 유난히도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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