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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ungoo Aug 20. 2024

그림쟁이의 남편 - 10

그 세계의 울타리

아내 작업실 근처의 OO대학교가 여름방학에 돌입하자, 그 대학 학생들 몇 명에게서 화실 수업에 대한 문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모처럼의 기회에 한껏 흥분했을 것이며, 서툰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성의가 느껴질 만한 답변을 보내야 한다는 부담에 한참을 인스타 DM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문장을 다듬었으리라. 일이 잘 성사되어 신규 화실생이 생긴다면 그만큼 기쁜 일이 또 있으랴마는, 아내는 희망찬 기대 속에 익숙한 두려움이 불현듯 솟아나는 기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사실을 마냥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운 뒤에는 반드시 그만큼의 불행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전형적인 비관주의자적 성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내의 화실 수업은 한 교시당 "3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물리적으로도 화실생과 매우 근접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러한 방식이라면 상호 간의 예의와 존중이 매우 중요하다는, 아내의 경우 지난 첫 손님*을 통해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던, 사실에 누구나 수긍하게 될 것이다. 아내의 두려움이란 바로 그러한 상호 존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에 관한 것이리라. 그렇다고 손님을 가려 받는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건방진 발상임이 분명하다.


모든 것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지 않냐는 뻔하고 하찮은 조언을 해서야 이 가여운 화실 주인의 마음에 어설픈 위안조차 될 수 없을 것임을 나는 금방 인지할 수 있었다. 하여, 화실 주인의 운이 자기 역할을 하기 이전에 그녀가 직접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보이지 않는 운이라는 놈은 언제나 자기 능력의 100%를 발휘한다는 보장이 없으니, 어쩌면 제대로 일한 적조차 있었는지 의구심이 생기니, 그의 역할을 무시해도 될 만큼의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나의 다른 세계 (캔버스에 유화)


우선 이 화실의 운영방침이 어떠한지 따져봐야 했다. 방침들이 세련되고 체계적인 인상을 주는지 따지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하게도, 그러한 것들은 화실 주인의 생각 속에만 어렴풋이 존재했을 뿐 문장의 형태로 세상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상태였다. 일이 제대로 풀리게 하기 위해선 문제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미비점의 발견은 조언자에겐 기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허술한 부분을 찾아내고 나자 해결책이 생각보다 쉽게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가 생각하는 화실의 방침이나 규칙을 잘 정리하기만 하면 모든 일은 잘 풀리게 되리라. 


아내의 화실은 그녀에게 있어서 단순히 공간적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 안은 하나의 세계이고, 그렇기에 외부 세계와는 구분되는 울타리가 존재한다. 그 울타리는 외부의 접근을 무분별하게 차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안쪽 세계에 대한 나름의 규칙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위한 관문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세계의 환경이나 방침에 동의하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고 그림을 포함한 예술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그토록 평범한 토론과 배움이 가능하게 될 것이었다. 당연히 아내는 자기의 세계를 절대 강매하지 않는다. 선택은 오로지 방문자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실제로는 전혀 거창할 것 없는 운영 방침이다. 예를 들면 수업 중에 정치 이야기 같은 관련 없는 잡담은 금한다거나, 화실생 수준에 맞춰서 나름의 커리큘럼으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내용들이다. 일전의 첫 손님의 경험을 다시 떠올려 보면 반드시 넣어야 할 방침들이 더욱 분명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은 그냥 기분 탓일까. 앞서도 거론된 첫 손님에 대한 상세한 일화는 생략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울타리 이론이 적립되기 이전의 시기, 즉 무방비 상태에서 맞이한 손님으로서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분들을 '인생의 선생님'이라 통칭하기도 하는데, 이유는 현실 세계의 잔혹함을 몸소 체험하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초보 화실 주인은 며칠 심사숙고하여 매너 넘치고 진솔한 화실 분위기에 어울릴만한 훌륭한 운영 방침들을 작성했을 것이다. 작성자의 의도에 동의하여 합리적인 방침들이라 판단하거나, 반대로 그것이 강압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방문자에 따른 피드백 차이가 바로 못 미더운 그 운이란 녀석을 대신할 장치가 되어줄 것이리라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으나 현재는 3명의 화실생이 거의 동시에 생기면서 때아닌 방학특수를 누리고 있다. 그러한 해피엔딩이면 좋겠지만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다음 과제를 안겨줄 것이다. 아내는 가르쳐주기 위해서 분투하고 있으며, 왠지 기진맥진한 날들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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