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nungoo Aug 27. 2024

그림쟁이의 남편 - 11

젊은 날의 초상화

어느 날 그림쟁이는 시부모의 초상화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기를 따져보면 그 계획은 충분한 타당성을 지녔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곧 시아버지의 생일이었고 또 얼마 뒤면 어버이날과 시어머니의 생일까지 연달아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 선물이 되어야 했으므로 당사자를 모델로 앉혀놓고 그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 끝에 시부모의 젊은 시절 모습을 초상화에 담는 쪽으로 작업의 방향을 잡았는데, 언젠가 남편의 본가에서 봤던 그들의 옛 사진을 떠올린 모양이다.


남편은 자신의 부모를 위해 그런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는 아내가 참으로 기특하게 여겨졌음에 틀림없었지만, 그보다는 우려스러운 마음이 더욱 지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평소 차분하게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사안을 판단할 줄 아는 그림쟁이의 남편은 아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초상화는 난이도만으로도 상당히 어려운 축에 든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사실은 남편이 우려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림이 완성된 이후에 일어날, 초상화의 주인공에게 평가받는 절차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남편에게 걱정거리였던 것이다. 평가자의 싸늘한 반응마저 감당해야 할 가여운 처지에 놓일 아내를 생각하니 남편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였다.


그림쟁이는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 대게 그러하듯, 자신의 선물에 감동하게 될 시부모의 반응을 상상하며 의기양양하게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내 남편의 걱정이 그녀에게도 전염되는 듯했다. 선물을 주는 기쁨은 어디까지나 최종 결과에 해당하는 것일 뿐, 과정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초상화에 관한 자신의 기량이 만족스럽지 않음을 금방 통감했으며, 훈련을 게을리한 시간들을 후회하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초상화는 인물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도 어렵지만, 수밀리미터의 오차만으로도 전혀 닮지 않거나 인상까지 달라진다는 점에서 정밀한 묘사가 요구된다. 하물며 초상화의 주인공은 자기 얼굴을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봐온 터라 세상 누구보다 민감하게 오차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 그림쟁이는 서서히 불안감을 느꼈다. 일이 잘못될 경우 닮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보기에도 그다지 좋지 않을 수 있기에, 앞선 남편의 우려를 스스로도 감지하게 된 것이다.


옛 사진 속의 아버지는 '내 비록 가진 것은 별거 없지만 아내와 함께라면 잘 살아볼 각오가 되어 있다'라는 듯 패기 가득한 눈빛을 지녔으며, 그 옆의 여인은 그런 듬직한 남편의 어깨에 몸을 살짝 기대어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부모님의 풋풋한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며 남편은 잠시 감상적인 마음에 빠져드는 듯하였으나, 이 흐릿한 사진이 어떻게 그림으로 적절히 변환될 수 있을지 아내의 과제가 염려되었다. 그림쟁이의 남편은 한순간 이러한 압박의 경험도 훌륭한 훈련의 일환으로서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에 도달했으며, 그인해 아내에 대한 기대감이 증폭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기대감으로 인해, 그림의 중간 과정을 지켜본 남편은 아내를 질책하는 크나큰 실수까지 범하고 말았다.


그림쟁이는 자신의 무능과 오만을 통감했고, 억울하게 남편의 비난까지 감당해야 했다. 결국 그림은 혼자만의 고독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수정을 거듭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는데 이른다.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는 화가들이 얼마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그림쟁이는 여기서 붓을 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 그림은 바로 그녀의 현재였으며, 그 기록으로서 어딘가에 남게 될 것이었다.


젊은 날의 초상 (캔버스에 유화) - 지명수배 아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대게 그러하듯, 시부모는 완성된 그림을 보자 우선은 기뻐하였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입을 살짝 벌린 채 그림을 향해 맹렬히 움직이는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들의 뇌가 자동적으로 냉철한 평가에 돌입한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들의 기억 속 영광스러운 젊은 시절은 그 순간 더욱 미화되었고, 그토록 왜곡된 기억 앞에서 눈앞의 그림은 한낯 모조품일 뿐이다. 선물의 감상과 평가는 아주 짧은 시간에 마무리되었다.


시부모는 며느리의 선물을 벽 한편에 걸었다. 그 초상화는 매일 그들의 눈에 스쳤고, 이따금 지긋이 바라보기도 했다. 어떤 날은 특이한 색들과 세세한 붓터치들에 대해서, 전에는 눈치채지 못한 부분들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하였다. 이따금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면 초상화가 자신들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여 며칠간 집을 비우게 되면 어서 집으로 돌아가 그림을 보고 싶다는, 그리움과 비슷한 감정까지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늙은 부부의 마음속 한 곳에는 그 젊은 날의 초상화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그림쟁이의 남편 - 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