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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기자 Aug 18. 2023

“나에게 검은색이란…”

[6인치 미술관] 유현경이 붓질을 멈추지 않는 이유

AR·VR 기술을 활용해 작가들의 작품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MZ세대 역시 예술에 관한 관심이 기성세대 이상으로 높죠. 그러나 작가 전시회나 예술 관련 이벤트 대부분이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습니다. ‘6인치 미술관’ 기획 취재는 이런 간극을 실감형 콘텐츠를 활용해 좁혀보려 합니다. MZ세대에게 인기 있거나 업계에서 주목받는 신진·중견 작가의 작품과 작업실을 신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어 예술 기사는 지루하거나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수행 위해 택한 베를린行

● 인지 밖 다루는 게 추상

● 추상화 해석, 감정 이상 논리 필요치 않아

● 내면 진솔함 담은 그림… “한 명이라도 이해해 준다면 감사한 일”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7월 9일 독일 베를린 바이센제 작업실에서 만난 유현경 작가. [지호영 기자]

거침없이 움직인 붓의 흔적과 이목구비가 흐릿한 얼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이 작가는 무엇을 그린 걸까?’ 하고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봤다. 4월 ‘2023 화랑미술제’에서 본 유현경(38) 작가의 그림이었다. 표정이 없는 그림 속 인물은 무릎을 끌어안고 상실감에 빠진 것처럼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6월 서울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가난한 사람’에서도 차가운 새벽 공기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그려낸 밤 풍경에서 쓸쓸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유현경은 15년간 추상회화를 통해 자신의 속마음을 꾸준히 고백해 온 작가다.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나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한 뒤 줄곧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 2019년 제8회 종근당 예술지상을 받았고 학고재 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두산 갤러리 등 국내 주요 갤러리에서 개인·단체전을 열었다.

유현경 작가는 서울을 떠나오기 전 자신이 쓰던 수장고에서 ‘안녕, 한국’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유현경]

현재 유 작가의 거주지는 독일 베를린이다. 활발하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2020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월 1일. 유 작가가 베를린에 도착한 날이다. 그는 “기억하기 좋게 연초에 왔다”며 “한국에서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전했다. 7월 9일 바이센제(Weissensee)에 위치한 작업실을 찾아 그의 속마음을 더 들어봤다.

https://my.xrview.co.kr/show/?m=NDznAkGorBK


고독함 찾아 베를린으로

한국을 떠나온 계기가 있나.


“평소 사람을 좋아하고 찾아다니는 편이라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작업이 안 됐다. 그렇게 살다가 문득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한 생활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베를린에 왔다. 이곳에서는 일상생활과 작업, 걷기가 주요 일과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생활하는 데 한계가 있을 줄 알았지만 오히려 좋더라. 지금의 삶이 전보다 더 큰 만족을 주는 것 같다.”


베를린을 선택한 이유는.


“2011년쯤 독일 북부 슐로스 플뤼쇼(Schloss Plüschow) 레지던스에서 작업한 적 있다. 플뤼쇼는 함부르크에서 동쪽으로 100㎞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다. 그때 독일이라는 나라를 처음 경험했는데, 차분하고 오래된 저장소 같아서 혼자 작업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이후 런던·뉴욕 등 여러 도시에서 작업했고, ‘앞으로 또 어떤 도시에서 작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 과거 방문한 독일이 떠올랐다. 원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려다 계약한 집에 문제가 생겨 온 게 베를린이다(웃음).”


작업실이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데.


“베를린에 도착해 스튜디오 임대 비용을 알아봤는데 5년 전에 알아봤을 때보다 2~3배 오른 상태였다. 베를린은 비자 발급 신청 절차 외에도 여러모로 작가가 작업하기 좋은 환경이라 개인 작업을 하는 사람이 많고 그들과도 자리다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외곽으로 오게 됐다.”


[+영상] 베를린에 사는 유현경 추상 화가는 그림을 어떻게 그릴까?


시간·감정 담은 추상화

“(이젤) 앞에 서보세요. 그려드릴게요.”


유현경 작가가 작업하는 장면을 영상에 담고자 자세를 잡아달라고 하자 그는 기자를 이젤 앞에 세우곤 배경 작업을 해놓은 캔버스를 꺼내 와 유화 물감을 용기에 덜고 붓을 들었다. 붉은색과 검은색 물감을 묻힌 붓이 여러 번 오가자 초상화 한 점이 완성됐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작가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붓질에는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유현경 작가가 현장에서 그린 기자의 초상화. [지호영 기자]

추상화를 그리는 이유가 있나.


“어떤 사물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구상은 어떤 사물을 그릴 때 작가가 대상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시선을 나타내는 반면 추상은 인지 밖의 것을 다룬다. 우리가 인식하고, 인지하는 것은 특정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 외에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에 관해 더 알아보고, 그 중요성을 들여다보고 싶어 추상을 선택했다.”


그림에 검은색을 많이 쓴다.


“내 그림을 좋아하는 어떤 분이 ‘붓질은 작가에게 뼈대 같은 것이라 쉽게 바뀌지 않는다’며 ‘유현경의 뼈대는 검은색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림을 그릴 때면 주로 검은색을 쓰고 있었다. 하늘색이나 파란색과 같은 다른 색보다 검은색은 많은 것을 함의하지 않은 색이라 편하게 쓰는 편이다.”

표정이 없는 작가의 초상화. 검은색을 주로 썼다. [유현경]

인물 그림을 많이 그렸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적인 무언가를 끄집어내면서 계속 작업하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가끔 작업을 쉬어가고 싶을 때 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린다.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작업 과정에서 모델이 큰 울림을 주기도 하니 단순히 그림의 대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매력적 인물이 있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대상일수록 그릴 때 생각이 많아져서 더 못 그린다. 시간이 맞는 사람이나 모델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작업실로 오라고 한다. 모델을 그리는 작업이 다른 작업보다 수월한 이유는 상대에 대한 어떠한 편견 없이 그림의 대상으로 만날 수 있어서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서 그의 모든 것을 그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순간 본 모습 정도만 그리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한다.”


작품에 길이 자주 나온다.


“베를린에 온 뒤 두세 달 지나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통행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사람도, 화려한 것도 없는 길을 혼자 걸어 다닐 때가 많았다. 그림에 나온 길은 실제로 지나다닌 길이다. 비슷한 길 같아도 그림에 표현한 그날의 날씨와 풍경의 색, 공기가 조금씩 다르다. 그림을 보면 최근 몇 년간 어떻게 지냈는지가 드러난다. ‘작가가 이러한 풍광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냈구나’ 정도로 봐주면 좋을 것 같다.”


그림에서 외로움이 느껴지던데.


“나를 잘 아는 친구에게 최근에 그린 길 그림을 보여주면서 ‘어때? 차분하지 않아?’라고 묻자 ‘너무 불안정해 보인다’고 하더라(웃음). 그림에서 내 감정 상태가 여실히 느껴졌다고 한다. 매번 주위에 말로는 ‘괜찮다, 괜찮다’고 하지만 그림에는 항변할 수 없는 시간이 담긴 것 같아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기분 좋은 충격을 받았다.”

2021년 겨울 작가가 거닐던 베를린의 길거리를 그렸다. [유현경]

추상화 감상? 직감이 전부

추상화는 감상하기 어렵다는 사람이 많다.


“추상화가 어렵다고 하지만, 사실 한국 사람만큼 뭔가를 빠르게 판단하는 사람도 없다. 전시를 보고 각자 마음속에 감상을 담고, 그림의 분위기로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어느 정도 눈치채기도 한다. 나는 작품으로 스스로를 꽤 보여주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관객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무섭다’ ‘유쾌하다’ ‘불안하다’는 느낌을 받고 자신도 모르게 그걸 내뱉는다. 그게 다다. 어떤 그림을 보고 불안정하다고 느꼈다면 그 감정이 맞다. (추상화 감상은) 어려운 게 아니다. 그냥 보고, 직감적으로 느끼면 된다. 감정 이상의 논리적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작품에 여백이 많다.


“의도해서 남긴 공간은 아니지만 단순히 빈 부분도 아니다. 선을 그으면 그 선을 기준으로 캔버스의 공간이 나뉘는데, 여백은 그림을 그리면서 저절로 생겨난 공간이다. 캔버스 앞에 설 때면 캔버스를 채워야 한다는 ‘화이트 공포’를 느끼곤 하지만, 나는 캔버스를 다 채운 그림보다 채우지 않은 그림에서 더 큰 울림을 느낄 때가 많다.”

여백이 돋보이는 작가의 풍경 그림. [유현경]

붓질을 한 번 더 했다가 후회한 적도 있나.


“그렇다. 매일 후회한다. 조금 더 그렸다가 실패할 때가 가장 힘들다. 그 과정이 쌓여서 이제는 ‘여기까지만 그려도 되겠다’는 판단을 조금 더 빨리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도 그릴 때마다 항상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웃음). 타협점을 찾는 과정에 있다.”


고민을 켜켜이 쌓아 만든 작품 가운데 스스로는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을까. 유 작가는 “최근 그린 그림이 가장 좋다”며 “그림을 그릴수록 더 깊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유 작가는 “항상 작품을 볼 한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며 “그림에 내면의 진솔한 것들을 담기에 단 한 명이라도 그림의 맥락을 이해해 준다면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베를린=이진수 기자 h2o@donga.com


https://shindonga.donga.com/culture/3/05/13/4343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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