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치 미술관] “일러스트는 나만의 현실 해석법”
AR·VR 기술을 활용해 작가들의 작품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MZ세대 역시 예술에 관한 관심이 기성세대 이상으로 높죠. 그러나 작가 전시회나 예술 관련 이벤트 대부분이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습니다. ‘6인치 미술관’ 기획 취재는 이런 간극을 실감형 콘텐츠를 활용해 좁혀보려 합니다. MZ세대에게 인기 있거나 업계에서 주목받는 신진·중견 작가의 작품과 작업실을 신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어 예술 기사는 지루하거나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영국에서 만난 친구 덕에 한국 진출
● 파리·레스코닐 두 곳 오가며 작업
● 주변 일상에서 영감 받아
● 그림으로 세계적 공감 얻을 것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한국 팬들이 저를 왜 좋아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줄은 몰랐다.”
프랑스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 장 줄리앙(Jean Jullien·40)에게 지난해 10월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회고전 ‘그러면, 거기(Still, There)’ 흥행을 예상했는지 묻자 그가 피식 웃으며 한 말이다. 해당 회고전은 지난해 국내에서 성공한 대규모 전시 가운데 하나다. 당시 전시장 앞은 이른 아침부터 그의 내한 소식을 듣고 온 관람객으로 북적였고, 오픈런 행렬이 이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장 줄리앙 작가는 주변의 일상을 일러스트·회화·설치미술·사진·영상 등 다양한 작업 방식으로 재치 있게 작품에 담아낸다. ‘소셜미디어’라는 바다의 회오리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 영어로 월요일(Monday)이라고 쓰인 글자 모양 계단을 울면서 올라타는 직장인을 그리는 식이다. 이런 유머와 센스는 이 젊은 프랑스 작가를 전 세계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르게 했다. 2018년에는 ‘뉴욕타임스’, 2019년에는 ‘워싱턴포스트 매거진’ 등 외국 매체가 그의 삽화를 실었다.
8월 14일 기준 장 줄리앙의 인스타그램 폴로어(follower)는 약 124만 명이다. 그는 어느덧 지구 반대편인 한국에서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장 줄리앙? 알지, 그 DDP에서 전시한 사람!”이라고 아는 체할 만큼 인지도가 높아졌다.
https://my.xrview.co.kr/show/?m=KbmhPMaLn86
7월 12일 그의 작업실이 있는 파리 19구에서 작업 여행을 막 마치고 돌아온 작가를 만났다. 그는 “한국 언론을 통해 팬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겨서 기쁘다.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응원을 보내준 한국인은 소중한 관객”이라며 인터뷰에 앞서 진심을 건넸다. 인터뷰 내내 풍기는 유쾌한 에너지는 해가 늦게까지 지지 않는 파리의 여름과 같았다.
장 줄리앙은 2008년 영국의 명문 패션 학교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 2010년 영국 왕립예술학교에서 아트커뮤니케이션 석사과정을 밟았다. 2006년 그래픽디자인을 공부하던 시절 우연히 같은 반에서 한국인 친구 허재영(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누누 디렉터)을 만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
2016년 허 디렉터는 한국에 들어오면서 장 줄리앙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 ‘스테레오 바이널즈’와의 협업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국 땅을 처음 밟은 장 줄리앙은 같은 해 10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복합문화공간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첫 번째 한국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울을 기반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누누(NouNou)’를 론칭했다.
DDP에서 연 ‘그러면, 거기’ 전시가 대박 났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장 줄리앙을 알더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감사하다. 특히 재(작가가 허재영 디렉터를 부르는 이름)와의 우정이 작업에 큰 도움이 됐다. 고마운 게 많다. 한국 사람들이 왜 나를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웃음).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줄 몰랐다.”
상업 활동에 적극적이고 작업에 경계를 두지 않는다. 자기 PR 능력도 뛰어난 것 같은데.
“운이 좋았다. 나는 사업적 고민을 하기보다는 5년, 10년 단위로 언제 어떻게 뭘 하고 싶은지 계획하는 편이다. 애니메이션 작업을 늘 해보고 싶었는데, 넷플릭스와도 프로젝트를 하게 됐다. 하고 싶은 걸 이루기까지 몇 년이 걸리더라도 일단 계속 시도하는 편이다.”
꽤 일찍부터 이름을 알렸는데 경력에 반전을 준 작품이 있나.
“SNS와 휴대전화 사용에 관해 작업한 그림이 주목받았다. 요즘 사람들에게 ‘(SNS가 없던) 나 때가 더 나았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더라(웃음).”
장 줄리앙은 작업실 두 곳을 오가며 그림을 그린다. 하나는 프랑스 북서부의 해안 도시인 레스코닐(Lesconil)에, 다른 하나는 파리 도심 끝에 자리한 19구에 있다. 작가와 만난 19구 작업실은 4명의 예술가가 함께 쓰는 공유 스튜디오다. 조각가이자 음악가인 작가의 동생 니콜라스 줄리앙, 일러스트레이터이자 화가인 그웬달 르 벡 외에도 2명의 애니메이터가 같이 있다.
오랜 시간 런던에 있다가 파리로 왔다. 도시마다 작업에 주는 영향이 다를 것 같은데.
“런던에서 만화 작업을 할 때는 도시의 영향을 받았지만 지금은 별다른 게 없다. 나는 주로 자연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좋아하는 환경이) 바뀌어서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그렇지만 지금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자연이 좋다.”
그런데도 도시에 머무는 까닭은.
“다른 예술가들을 만나기 쉽고, 친구들도 있어서 생활하기가 편하다. 자연에서 작업했다면 영감이 쉴 틈 없이 떠올라 그림만 그렸을 거다. 파리에서는 작업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레스코닐에 있는 작업실도 궁금하다.
“레스코닐에 사시는 부모님 댁과 가까운 길가에 있는 작은 집을 샀다. 어부들이 살던 집인데 그들이 집 옆 창고로 쓰던 곳을 작업실로 개조해 쓰고 있다. 이번 주에도 갈 예정이다.”
U자형으로 긴 코와 큰 눈에 작은 동공을 가진 인물 일러스트, 상황을 섬세하게 묘사한 스케치, 서프보드가 물줄기를 시원하게 가르는 회화까지. 서울에서 열린 장 줄리앙의 회고전을 본 사람들은 “단순한 색감이 매력적” “유쾌하고 직관적인 그림”이라고 호평했다.
장 줄리앙은 “그림은 내가 본 걸 요약한 것이고, 일러스트는 나만의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인 셈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표현 방법이 사진일 수도 있고, 프랑스어나 한국어일 수도 있지만 내겐 그게 그림이다. 그림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한다”라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궁금하다.
“일몰 그림을 예로 들면 해가 내려간 모습같이 그림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을 먼저 상세하게 표현하고 사람을 한 명 그릴지, 두 명 그릴지 세부 구성을 조절한다. 일러스트를 그릴 때는 내가 그걸로 무엇을 말하고 싶고, 느끼게 하고 싶은지를 중요하게 본다. 어느 한 장면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림을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생각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필요한 디테일을 수집해 가며 그린다.”
사회 비판적 그림을 보면 꽤 거침이 없다. 최근에는 어떤 이슈에 관심이 있나.
“특정 이슈를 언급하기는 조심스럽다. 내가 어떤 지식이나 조언을 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지 않나. 특히 정치적인 것들 말이다. 하지만 ‘불평등’에 관해서는 생각도 많고, 할 말도 많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프랑스 비영리단체인 ‘스쿠르 포퓰레르(Secours populaire)’와 함께 그림을 넣은 티셔츠를 제작해 판매했다.”
어릴 적 만화책을 좋아했다고.
“동생 니콜라스와 만화책을 보면서 자랐다. ‘스파이더맨’과 ‘괴물들이 사는 나라(Where the wild things are)’를 좋아했다. 책 속 그래픽 언어가 마음을 움직였고, 그때의 마음을 발전시켜 작업으로 연결해 나갔다. 부모님께서 만화책을 보라고 권하시진 않았지만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존중해 주셨다.”
굉장히 여러 방법으로 작업한다.
“한 가지만 파고들자니 특출하게 하지는 못해서 여러 가지를 하는 것이다(웃음). 아내의 초상화를 그린다고 생각해 보자. 한 가지 방법으로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본능에 따라 작업하는데, 회화나 설치미술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장 줄리앙이 인터뷰 중 갑자기 수첩을 집어 들더니 펜으로 쓱쓱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뭘 그리는 걸까’ 궁금해서 보니 기자가 작가에게 질문을 건네는 모습이었다. 그는 매일 수첩에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는데, 그렇게 다 쓴 수첩이 100여 권에 달한다.
아이를 돌보면서 수시로 기록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
“4살, 7살 된 아들 둘이 있다. 보통 할 일이 없을 때 스케치하는 편인데, 레스코닐에 머물면서 아이들을 돌볼 때엔 그림 그릴 여유가 없다. 아이가 생긴 뒤에는 마주한 순간을 한 주에 몰아서 작업하곤 한다. 이런 변화가 좋다. 덕분에 작업도 많이 변했고.”
장 줄리앙은 8월 26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알부스 갤러리’에서 열리는 전시 준비에 한창이다. 주제는 ‘친구들(Les Amis)’이다. 그는 “한국에서 전시를 한 번 해보니 다른 예술가 친구들도 데려오고 싶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를 잘 이해해 주는 것 같다. 종종 ‘너는 회화 작가니까 회화만 해야 해’ ‘너는 일러스트레이터니까 일러스트만 그려야 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한국은 달랐다. 나처럼 다양한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의 삶을 존중해 주더라. 작품 종류가 달라도 모두 한 예술가의 작품으로 이해해 줬다.”
그는 “앞으로 작품이 (현재 활동 영역을 넘어) 세계적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통해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파리=이진수 기자 h2o@donga.com
https://shindonga.donga.com/culture/3/05/13/43629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