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치 미술관] “내게 그림은 일종의 영역 표시”
AR·VR 기술을 활용해 작가들의 작품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MZ세대 역시 예술에 관한 관심이 기성세대 이상으로 높죠. 그러나 작가 전시회나 예술 관련 이벤트 대부분이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습니다. ‘6인치 미술관’ 기획 취재는 이런 간극을 실감형 콘텐츠를 활용해 좁혀보려 합니다. MZ세대에게 인기 있거나 업계에서 주목받는 신진·중견 작가의 작품과 작업실을 신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어 예술 기사는 지루하거나 어렵다는 선입견을 깨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 자전적 이야기 작품에 녹여
● 작업 초기, 포토샵 쓴다고 비판
● 캔버스 제작도 수작업으로
● 뉴욕에서 한국 작가로 우뚝 서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붉고 노르스름한 천 더미를 구겨놓은 듯한 그림 가운데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그 빛을 감싼 누군가의 팔과 손이 보인다.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가 이불에 들어가 랜턴으로 장난을 치는 모습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한국계 미국인 진 마이어슨(Jin Meyerson·51) 작가의 작품 ‘강령회(Séance)’ 시리즈 가운데 하나다.
강령회는 모더니즘의 전성기 시절 유럽의 신지학협회가 열었던 일종의 종교의식이다. 작가는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행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을 만들었다. 진 마이어슨은 1976년 입양촉진 및 절차에 관한 특례법(당시 입양 특례법)이 제정돼 해외 입양이 급격히 늘어난 시기 미국 미네소타주로 입양됐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친어머니와 닿을 방법을 고민하다 강령회 시리즈를 시작했다.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영국 런던 사치 갤러리, 벨기에 브뤼셀 반헤렌츠 컬렉션…. 작가의 그림을 보유한 전 세계 유명 미술관과 갤러리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그의 그림은 현대 미술 거장 컬렉터인 찰스 사치(Charles Saatchi)와 뉴욕 현대 미술관(MoMA) 전 이사장인 제리 스파이어(Jerry Speyer)가 소장할 정도로 미국·유럽·아시아 전역의 팬들을 매료시켰다.
1972년 인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간 네 살 꼬마가 중견 작가로 성장해 다시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겪었을까.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자 7월 28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작가는 “내 한국말 실력은 유치원생 수준”이라며 영어로 인사를 건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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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영어도 잘 못했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유일하게 좋아했던 그림이 생존 수단이나 마찬가지였다. 1975년 3월 말 시장에 버려졌을 때 생긴 트라우마에서 그림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진 마이어슨이 미국에 갈 때 가져간 건 입을 옷과 예술에 대한 애정, 두 가지였다. 스웨덴계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작가는 미네소타의 한 농촌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양조부모는 어린 그를 데리고 미국 교외 지역을 돌아다니며 나무와 소, 구름을 보여주고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지 알려줬다. 그런 날이면 작가는 집에 돌아와 그날 배운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1995년 미네소타 예술디자인대에서 미술을 전공한 작가는 1997년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순수 미술 아카데미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림에 개인적 이야기를 담은 계기가 있나.
“그림은 내게 물을 마시는 것과 같았다. 지금은 구글이나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 뭔가를 검색하면 원하는 정보를 다 찾을 수 있지만 내가 어릴 적엔 그런 게 없었다. 그림으로 나만의 기록을 만들고 영역을 표시한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들도 개인적 트라우마에서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 화가인 조셉 보이스(Joseph Beuys)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공군 조종사였는데,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 작업을 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 상실의 사연 같은 내 이야기를 그림에 담아야지, 단순히 판매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진짜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화에서 그림이 탄생한다고.
“내 그림은 소속감·이주·후기 식민주의 등 개념을 다룬다. 초기작을 제외한 작업물의 90%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심리학자·건축가 등 다양한 예술가, 한국인 장인·장모님, 내 출생 기록이 남은 입양 기관 관계자와 나눈 대화 등을 작품에 담았다. 이런 상황에서 오간 대화가 작업 아이디어로 이어지고, 그 아이디어가 스케치로, 스케치에서 다시 회화로 연결된다.”
진 마이어슨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문 회화 작가로 독특한 화풍을 나타낸다. 작가는 자신이 수집한 이미지를 포토샵, 컴퓨터 그래픽(CG), 3D 스캔 등 디지털 기술로 왜곡하거나 변형시켜 캔버스에 그림으로 옮긴다. 뒤틀린 모양의 회화를 보면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996년 그가 그림에 포토샵을 도입했을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다들 아날로그 작업에 익숙했던 터라 “편법을 쓴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작업 초반에 비판받았다고.
“(포토샵을 사용해) ‘커닝한다’ ‘치트키를 쓴다’고 비판하더라. 당시 회화 미술은 작가의 손에서 모든 것이 탄생해야 하는 그림으로 여겨졌다. 나는 꼭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 그림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과도하다고 느끼거나, 압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호불호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포토샵을 적용하기 전엔 어떤 그림을 그렸나.
“추상적인 걸 그렸다. 캔버스에 타르를 얹기도 했고 모노크롬(한 가지 색만 사용하여 그린 그림) 느낌이 강한 작품도 있었다. 그러다가 실제로 보는 것을 그리고 싶어져 현실주의를 추구하면서 구상적 그림을 그렸다. 아직 정체성을 찾기 전이라 남의 주방에서 요리하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뉴욕으로 가 스튜디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조금씩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그제야 내 식당을 차린 느낌이 들더라.”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펜실베이니아 순수 미술 아카데미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유럽 전통 회화 기술을 배웠다. 서구권에서 자란 동양인 화가로서 서양 회화를 작업에 어떻게 녹여내는지가 중요했다. 캔버스 스트레칭(천을 캔버스 틀에 고정하는 작업)과 프라이밍(물감이 잘 묻어나도록 표면을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을 수작업으로 한다. 색을 혼합할 때도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하르먼 손 반 레인이 사용했던 8~9개 색을 쓴다.”
6월 뉴욕 한복판에서 한국 작가들의 전시가 열렸다. 록펠러센터에서 한국 문화 축제의 일환으로 개최한 전시 ‘기원, 출현, 귀환(Origin, Emergence, Return)’이다. 한때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한 진 마이어슨은 한국 작가로서 국내 현대 미술의 거장 박서보, 이배, 윤종숙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한국과의 연이 끊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붓을 든 노력이 헛되지 않은 순간이었다.
지난해 작가는 20여 년 전 제리 스파이어에게 판매한 그림을 무료로 보수해 주러 갔다가 ‘기원, 출현, 귀환’ 전시 소식을 접했다. 마침 록펠러센터를 소유한 글로벌 부동산 운용사 ‘티시만 스파이어’가 ‘한국 주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제리 스파이어로부터 “참여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 제리 스파이어는 2004년 뉴욕에서 열린 작가의 인생 첫 개인전에서 5m 길이의 대작을 구매한 준 귀인이다. 작가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작가 생활을 시작한 뉴욕에서 한국 작가로 당당히 선 기분이 어땠나.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자부심을 느꼈다. 잘 아는 국내 작가들과 함께해서 감회가 새로웠고, 한국 예술가가 이렇게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어릴 적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만 가도 중국·일본관은 엄청나게 큰데 한국관은 없었다. 그런 과거를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한국 예술 공동체가 이루어 낸 성과인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듯한, 강렬한 경험이었다.”
사람들이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까.
“상실과 트라우마에 기반을 둔 작품이라 사람들에게 ‘실패·상실을 겪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위안을 주는 것 같다. ‘한’이라는 정서는 아일랜드·러시아·포르투갈 미술 작품에도 있는 보편적 감정이다. 책을 읽고 스토리에 공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어느 날 아내가 ‘내 작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별나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나랑 결혼한 사람이 제일 별난 게 아닐까’라고 답했다(웃음).”
그는 지금도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3월에 열린 아트페어 ‘아트 바젤 홍콩’에서는 증강 현실(AR) 기술을 활용한 단독 부스 전시를 선보였다.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이제껏 보지 못한 미술을 경험했으면 한다는 그의 다음 목표는 간결하고도 명확했다.
“(내 작업물이) ‘이 작품이 누구 것이냐’라고 물으면 바로 ‘진 마이어슨’이라는 답이 나오는 그림이길 원한다. 그림을 보자마자 ‘미쳤다(holy shit)’ ‘장난 아니다’는 감상이 튀어나오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이진수 기자 h2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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