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범준 Oct 30. 2022

내 인생의 결정적 계기

2022 세바시 대학 4기 에세이집 <돌아보니 행복> 서문

글쓰기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좋아하지도 않고, 자주 쓰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글쓰기의 힘은 잘 알고 있습니다. 글쓰기는 종종 삶을 성찰하고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게도 그런 계기들이 있었습니다.


 사회 초년생 때 일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 입사 시험에 지원했고, 300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습니다. 그때가 1997년 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IMF 사태’가 시작된 시점입니다. 나는 합격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불안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경제 대란 속에서 작은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조차 연쇄 부도와 파산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공개 채용으로 신입 사원을 모집한 많은 기업이 채용을 취소했습니다. 제가 들어간 방송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수습 교육을 받던 중에 무기한 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신입사원 채용 취소를 하기 위한 수순이었습니다. 9명의 예비 PD와 기자들은 졸지에 백수와 다름없는 처치로 전락했습니다.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동기들을 모아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기사와 칼럼을 쓰고, 방송 모니터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인터넷 언론이었습니다. (내가 주장하기로는) ‘국내 최초의 인터넷 뉴스 사이트’였습니다. 그리고 한 7개월이 지났을까요? 무기한 대기 발령 신입 사원들이 인터넷 뉴스 사이트를 자발적으로 만들어 운영한다는 소문이 방송언론계에 퍼졌습니다. 어떤 신문사는 우리에 관한 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저런 ‘훌륭한’ 신입 사원들을 쫓아내선 안 된다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대기 발령 10개월 뒤, 우리는 마침내 정식 발령을 받고 어엿한 직장인이 됐습니다. 그때 썼던 글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매주 한 편 칼럼과 기사를 쓰느라 쩔쩔맸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물론 글이야 형편없었겠지요. 하지만 그 생존의 글쓰기 덕분에 나는 아직도 PD로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중견 직장인이 됐을 때 찾아옵니다. 직장 생활 10년 차를 넘기면서 찾아온 권태와 무기력감이 나를 괴롭혔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시청자들은 도무지 봐주질 않았습니다. 시청률은 늘 ‘0’에 수렴했습니다. ‘종교 채널이니까 그렇지, 작은 케이블 TV를 누가 봐주겠어’라며 저조한 시청률을 회사 탓으로 돌리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스스로 초라해질 뿐이었습니다. 그즈음에 운 좋게도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 한 시민단체가 수여하는 ‘좋은 프로그램상’을 수상하게 됐습니다. 시상식에 가보니 인기 예능 ‘무한도전’을 만든 김태호 PD도 있더군요. 그의 ‘무한도전’은 상의 순서로 따지면 3등 상을 받았습니다. 우리 팀은 대상, 1등 상이었지요. 그런데도 시상식장의 눈과 귀는 김태호 PD에게 집중됐습니다. 사람들은 대상팀인 우리에게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배알이 꼬이더군요. 자괴감과 열등감이 들었습니다. 사무실에 돌아와서 스스로 물었습니다. 이런 감정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 욕구불만의 이유는 무엇인지가 궁금했습니다. PD라는 직업을 통해서 충족시키고 싶은 ‘내 업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글 가운데 ‘업의 욕구’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했습니다. 그 한 줄의 문장은 이후 내가 일하는 태도와 방식을 바꿨고,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라는 이름의 강연 콘텐츠 기획으로 이어졌습니다.


 글쓰기는 일을 지속하는 힘을 주기도 합니다. 세바시를 시작하고 1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무명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알리는 일은 매우 고단한 일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두 배 더 일했으니, 두 배 더 빨리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세바시 강연자 덕분에 노장사상을 공부하는 모임에 초대받았습니다. 매주 한 번씩 노장사상을 전공한 교수의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모임을 마무리하는 뒤풀이 자리에서 학우 한 사람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배운 노장사상의 내용을 각자의 인생 이야기와 엮어서 글을 써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모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12명의 학우가 쓴 12편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이 출간됐습니다. 책의 이름은 <땡큐 도가>였습니다. 평생 품고 살 가르침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한 책에 이름을 함께 올린 배움의 동료가 생긴 것에 대한 감사를 책의 제목에 담았습니다. 제가 쓴 글의 주인공은 《장자(莊子)》의 〈양생주편(養生主篇)〉에 나오는 ‘포정’이라는 백정이었습니다. 비록 백정이라는 천한 직업을 가졌지만, 업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을 성장시키는 노력 때문에 그는 내 평생의 스승이 됐습니다. 배움을 나의 삶으로 곱씹어보는 글쓰기의 과정이 없었다면, 그런 ‘스승’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세바시는 11년은커녕 2년도 채우지 못하고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렇듯 글쓰기는 우리가 절망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구원의 계기가 됩니다. 글쓰기는 앞길이 막막할 때 길을 터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멀고 험한 삶이라는 여정을 지속하는 힘을 마련해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글쓰기가 자신과의 소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바시 대학을 만들고, 그 안에 글쓰기 전공 그룹을 만들고,  수료 학우들의 글로 책을 출간하자는 아이디어는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와 효용은 누구에게도 똑같이 가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삶의 길은 늘 울퉁불퉁합니다. 언제 어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어떤 오르막과 내리막 길에서 휘청일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여기 세바시 대학 글쓰기 전공 수료생들이 쓴 이 글들이, 저자 자신들에게는 물론 독자들에게도 삶의 역경을 돌파해내는 ‘결정적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구범준 세바시 대표 PD  

작가의 이전글 세바시, 답이 아니라 질문인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