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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범준 Oct 30. 2022

‘정정한 삶’을 위해

월간 공무원연금 10월호 칼럼

최근에 한 세바시 강연자의 칼럼을 읽고,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정정하다’는 나이가 들어도 건강하고 굳센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두의 ‘정정’은 한자어인데요, 전혀 뜻밖의 한자로 되어 있습니다. 한자를 조금 아는 사람들이라면 대개 젊고 건강한 남자를 뜻하는 장정 정(丁) 자를 쓸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뜻밖에도 정자 정(亭) 자를 씁니다. 그렇다면 ‘정정(亭亭)하다’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글을 쓴 성공회대 김찬호 교수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정정하다’는 말에는 ‘나무나 바위가 높이 솟아 우뚝하다’는 뜻도 있어서 정정함의 심오한 본질을 가늠하게 해 준다. 그러니까 정정함이란 단지 몸이 튼튼하고 기운이 팔팔한 것이 아니다. 정자처럼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있고, 안이 넉넉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은은한 정기로 기품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경향신문 2022년 8월 11일 자 김찬호의 칼럼 중에서)


정정함은 노년 시절에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자 사회적 인정입니다. 어느 인지 심리학자는 팬데믹 이후 인류는 끝없는 만족을 추구하는 '극대화된 삶'에서, 내 감정과 욕구에 알맞고 바른 '적정한 삶'을 추구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요, 저는 ‘정정한 삶’ 또한 노년을 앞둔 절반 이상의 인류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정정한 노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김찬호 교수가 알려준 ‘정정하다’의 참뜻에 따르면, 정정한 삶은 꾸준한 건강관리만으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정정함의 본질은 육체의 강건함보다 오히려 삶과 사람에 대한 특정한 태도를 통해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8월 말, 세바시에는 40년을 외과 의사로 일하고 정년퇴직한 분이 무대에 섰습니다. 퇴직 후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문인성 강연자는 우리 사회에 장기조직 기증 서약이 필요한 이유를 자신이 외과의사로 살아온 이야기에 담아 훌륭하게 대중에게 전했습니다. 강연을 준비하는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문인성 강연자가 저를 부르는 호칭과 태도였습니다. 그는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업력으로 따지면 제게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대선배였습니다. 게다가 한 공공기관의 수장이니 저는 그를 강연 ‘코칭’하는 일이 매우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일이 될 거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인성 강연자가 저를 만나자마자 한 말은 그런 우려를 쓸데없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대장님, 저는 세바시 강연을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 뒤로 강연 준비에서 방송까지 그가 전한 문자와 이메일에는 ‘대장님’이라는 호칭과 감사 인사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타심이 곧 행복한 삶의 열쇠라는 강연 메시지도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까마득한 후배를 대하는 친밀한 겸손함은 제게 더 큰 감동이었습니다. ‘정자처럼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있고, 안이 넉넉하게 비어 있어야 한다’는 정정함의 참뜻은 겸손과도 연결됩니다.

세바시 강연 | 문인성 전 가톨릭의대 교수 '외과의사로 일하고 깨닫게 된 행복의 기술'

‘정정한 삶’을 사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는 용기입니다. 국민시 ‘풀꽃’의 저자, 나태주 시인은 세바시 강연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세 가지의 ‘잉여 시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저녁 시간입니다. 온종일 일하고 퇴근한 이후의 시간을 말합니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두 번째 중요한 잉여 시간은 겨울입니다. 과거 농업 사회에서나 적용될 이야기지만, 그 의미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잉여 시간은 노년기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노년기야말로 진짜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시기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초년기에는 공부하랴, 청년기에는 일하랴, 그리고 중장년기에는 자녀들 키우고 돌보느라, 시인은 노년기 이전은 정작 자기만의 온전한 삶을 살기 어려웠던 시기라고 주장합니다. 

세바시 강연 | 나태주 시인 '멋진 글 쓰고 싶나요?'

이제 백세 시대라고 하니 노년기의 중요성은 더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중요한 시기에 대부분은 용기를 잃고 사는 것입니다. 꿈대로 살기에 너무 늦었지, 내가 늙어서 뭘 할 수 있겠어?, 이대로 살다가 조용히 가야지 등등, 노년기에 대부분 사람들을 지배하는 생각입니다.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은 힘과 의지를 써서 지켜야 합니다. 그 힘과 의지는 용기로부터 나옵니다. 늘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여기 다시 힘주어 써봅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정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구범준 세바시 대표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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