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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기정 Jan 17. 2019

불효자식

샤일록의 딸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라는 말이 있지요. 셰익스피어의 작중 인물 중 최고의 불효자식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탐욕 때문에 아버지를 버리는 <리어왕>의 두 딸, 고너릴과 리건이 우선 생각나는 불효자식이네요. 그들은 대표적으로 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관련해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과 <오셀로>의 데스데모나가 떠오릅니다. 그 둘은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불효를 하게 되지만 그들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젊은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비극적으로 죽으니까 그보다 더 큰 불효는 없습니다. 줄리엣이나 데스데모나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데 이는 그들이 강한 주체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의 딸 제시카의 경우는 미묘한 점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제시카가 나쁜 딸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는데요. 어릴 때지만 못된 샤일록을 곤경 빠뜨리는 면에 통쾌하게 생각했  잘못었다는  아주 나중 았습니다. 독자들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딸은 정말 최악의 불효자식입니다. 아시다시피 샤일록은 유대인입니다. 제시카는 기독교인 남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샤일록이 그 사랑을 인정할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제시카는 애인인 로렌조와 함께 도망을 가기로 합니다. 사랑의 도피에 그친다면 줄리엣이나 데스데모나와 동급 정도겠지만 제시카는 아버지 샤일록에 대한 심각한 배신 행위를 추가합니다. 집안에 있던 샤일록의 보석과 금화가 든 가방 두 개를 통째로 들치기해서 도주합니다. 제시카는 심지어 샤일록이 죽은 아내 레아로부터 받았던 터키석 반지를 원숭이 한 마리와 바꿉니다. 샤일록은 친구에게 이 소식을 듣고 '원숭이 숲 전체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반지'라며 비통해합니다. 샤일록에게 이 소식은 그의 표현대로 고문입니다. 그것은 아내의 추억이 담긴 상징적인 반지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이지요.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 장면은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사랑의 도피를 하는 것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딸이 아버지의 사업자금과 재산을 전부 훔쳐 도망간다는 것은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시카가 훔쳐간 보석과 돈의 가치는 정확한 수치가 나오지는 않지만 샤일록이 베니스 상인에게 빌려준 3000 두카토보다도 더 많은 돈으로 추정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수억 이상입니다. 샤일록이 재판에 져서 대부금조차 몰수당하고 기독교 개종을 명령받는 등 최악의 판결을 받은 상황에서 제시카와 로렌조는 재판에 승리한 포샤의 벨몬트 집에서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로렌조가 베니스의 상인 진영과 친구 사이였던 거지요. 물론 이렇게 극단적인 플롯을 설정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아이러니가 담긴 극작 수법이지만 이런 불효자식은 정말 끔찍하지 않습니까? 효도는 못하더라도 이런 배신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자식에게 당하는 배신보다 아픈 것은 없겠지요. 사실 최악의 불효자식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는 리어왕의 두 딸이겠지만, 아버지 샤일록의 파멸을 보면서 기독교인의 편에서 희희낙락하는 것으로 보이는 제시카가 더 못된 딸이라고 여겨지는군요. 샤일록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기 위한 셰익스피어의 인물 설정이 절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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