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기정 Jan 18. 2019

권위주의자 리어왕

진실을 외면하는 인간

권위주의자가 진실을 보지 못하고 고집을 부릴 때 생기는 비극을 그린 것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입니다. 플롯은 매우 단순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큰 깨우침을 주는 위대한 작품이지요. 왕이 나라를 셋으로 쪼개서 자식들에게 나눠 분할 통치하게 한다는 설정은 크게 설득력이 없지만, 이런 플롯은 셰익스피어 특유의 단순화 혹은 우화적 화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고령의 왕이 자식들에게 영토와 권력을 이양하고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려는 건 인간적이며 현실적인 희망입니다.  

    

<리어왕>은 매우 철학적인 작품이지만 그 이야기는 매우 간단합니다. 고집스러운 권위 때문에 가장 단순한 진실조차 보지 않으려는 인간에 대한 얘기입니다. 리어왕이 영토를 분할하는 방법은 세 딸에게 아비에 대한 효심을 각자가 말로 표현하도록 하여 사랑의 정도에 따라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딸들이니까 비슷한 표현으로 아비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을 기대하고 삼등분해주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리어는 사실 코델리아를 가장 사랑해서 막내딸에게 가장 좋은 영토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효심 테스트는 요식행위일 뿐이지요. 그도 이 간단한 문답으로 효심의 깊이를 측정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가 큰 딸 고너릴 Goneril과 둘째 딸 리건 Regan의 입바른 사랑의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작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막내딸 코델리아 Cordelia가 사랑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하자 막내의 몫까지 첫째와 둘째 딸에게 나누어 얹어주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사실 코델리아는 입바른 언니들의 위선에 화가 나서 입을 닫아버린 겁니다. 그때 리어왕은 막내딸 코델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말도 없다면 아무것도 줄 게 없다. Nothing will come out of nothing.”      


리어는 코델리아의 한 단어 대답 nothing이 왕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권위주의자 리어왕은 아무리 사랑하는 막내딸이라도 왕의 권위를 부정한다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리어왕의 충신 켄트가 간곡하게 왕의 결정이 잘못임을 지적하고 코델리아의 사랑이 결코 덜하지 않다는 것을 호소하지만 그는 켄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활은 이미 당겨졌다. 화살에 맞지 않도록 하라.”    


리어왕은 켄트에게 살고 싶으면 그만 닥치라고 하며 진실을 말하는 충신을 추방합니다. 막내딸 코델리아도 추방당하듯이 프랑스 왕에게 시집을 갑니다. 신하나 광대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면 리어는 왕으로서의 통치 행위는 훌륭했으나 자연인으로서는 허점이 많은 인간으로 판단됩니다. 그는 권위 의식과 독선으로 가득 찬 왕이며 타인에 대한 이해나 공감이 전무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리어는 권력과 재산을 전부 위의 두 딸에게 물려준 후에는 더 이상 왕이 아니지요. 그는 큰 딸 고너릴과 둘째 딸 리건의 집에 한 달씩 번갈아 묵으며 여생을 편하게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고너릴의 집에 묵기 시작하는데 오래지 않아 자기의 왕국에서 일상생활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기는 이미 왕국을 양도해 버렸으니 그의 왕국도 아닙니다. 고너릴이 리어에게 시종을 100명에서 반으로 줄이라는 등 훈계를 하자 큰딸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하는 그의 다음 말은 그가 처한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은혜를 모르는 아이를 갖는 것은 뱀의 독니에 물린 것보다 아프다.”    


고너릴의 푸대접에 화가 난 리어는 또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리어가 아니다.” 그는 이 순간 왕의 지위가 가지는 권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왕의 지위는 스스로 포기한 것이지만 딸로부터 당장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은 몰랐겠지요. 그는 분노해서 리건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리건은 한술 더 떠서 시종을 25명으로 다시 반으로 줄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언니 집으로 가서 한 달을 채우고 오라고 합니다. 리어의 광대가 큰딸이나 둘째 딸이나 사과와 능금처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그대로입니다. 리건과 그녀의 남편은 심지어 성문까지 잠급니다. 주변에서는 다 아는 사실을 당사자만 모르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도 흔히 있지요.     


두 딸의 홀대로 분노한 리어는 아무 대책 없이 폭풍 속으로 향합니다. 리어는 이제 무 nothing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폭풍 속에서 움막과 지푸라기의 소중함을 배웁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리어는 타인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건 켄트와 글로스터 등 충신과 그의 광대가 깨우쳐준 덕분입니다.

  

리어는 미쳐버린 후 비로소 진실을 깨닫게 되는데 다음은 권력에 대한 리어의 깨달음입니다. 권력을 잃어버린 후에야 이렇게 권력의 속성을 파악합니다.     


“그 인간은 개를 보고 도망갔지? 거기서 권위의 거대한 표지를 볼 수 있어.

 개라도 관직에 있으면 사람이 복종한다니까. 죄악에다 금으로 껍데기를 씌워봐.

 날카로운 정의의 창도 상처를 못 내고 부러질 테니.

 죄악을 누더기로 무장을 하면 난쟁이의 빨대로도 그걸 꿰뚫을 수 있지.”    


그것은 바로 어리석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리어는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반성하게 되는데,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매거진의 이전글 불효자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