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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파노 Jan 22. 2020

정말 역겨운 영화를 보았다. Act of killing

'몰라서 그랬어요'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액트 오브 킬링> 

'몰라서 그랬어요'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는 영화였다.


 인도네시아의 1965년 대량학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보았다. 영화는 약 3시간 동안 계속되는데, 3시간 내내 인간에 대한 실망과 혐오를 솟구치게 했다.

 인간의 무지함이 얼마나 큰 악이 될 수 있는지, 무지한 자를 이용하는 사회와 권력들은 얼마나 추악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라 하겠다.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더럽고 우울한 감정이 가시질 않는다. 역겹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은데,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고 체한 듯한 불편함이 오래 지속되었다.



 아래는 구글에서 이 영화를 검색하면 나오는 소개글이다.


"가해자가 승리한 세상! 윤리와 도덕의 진공상태에서 벌어지는 파국과 갈등! 1965년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 군은 ‘반공’을 명분으로 100만 명이 넘는 공산주의자, 지식인, 중국인들을 비밀리에 살해했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대학살을 주도한 암살단의 주범 '안와르 콩고’는 국민영웅으로 추대받으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의 ‘위대한’ 살인의 업적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온다. “당신이 저지른 학살을, 다시 재연해보지 않겠습니까?” 대학살의 리더 안와르 콩고와 그의 친구들은 들뜬 맘으로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도 하며 자랑스럽게 살인의 재연에 몰두한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 대학살의 기억은 그들에게 낯선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영화는 예기치 못한 반전을 맞는다. 전대미문의 방법으로 인간의 도덕성을 뒤흔드는 충격의 다큐멘터리!"



 아래는 줄거리와 주관적으로 뽑은 주요 장면 등을 정리한 것이다.


 1965년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이 집권하였는데, 집권 후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 수뇌부를 타격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으나 실패했고, 수카르노는 실각한다. 이후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는 쿠데타의 배후로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지목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공산당 박멸이라는 기치 아래에 공산당원은 물론이고, 관련 없는 시민까지 대규모로 학살당했다. 당시엔 공산당이 합법적인 정당이었으므로 공권력의 이름으로 숙청할 수는 없었으므로 수하르토와 하수인들은 불법 우익단체와 청년회 등을 몰래 지원하며 학살을 명령했다. 우익 세력 '프레만(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뜻)'과 '판차실라 청년단'이 권력의 힘을 업고 대규모 살인을 저질렀다. 비극은 이듬해까지 이어졌고, 백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로 끔찍한 일이지만 더 끔찍한 사실은 이 학살의 주동자들이 아직도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웅'들의 현재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인 까닭에 주인공은 있지만 연기자는 없다. 실제 그곳에서, 그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안와르 콩고가 주인공인데, 대학살 당시 행동 대장이었다. 프레만의 중간 두목이었던 그는 오랫동안 할리우드 영화를 동경해왔고, 제작진이 자신의 활약(?)을 재현하는 영화를 제작해 보자고 제안하자 기쁘고도 자랑스럽게 승낙했다고 한다.

 그는 외국인 감독 앞에서 자랑스럽게 자신의 업적을 세세히 증언하고, 재연까지 하며 즐거워했다. 이를 테면, 천명 이상을 죽이는 과정에서 칼로 찌르면 피가 튀어서 번거로우니 전선을 목에 감아 죽이는 혁신적이며 친인륜적인 살해 방법을 고안하였다고 자랑하고, 이를 열정적으로 재연하기까지 한다.


 안와르 콩고는 공중파 방송에도 출연하는데, 화기애애한 촬영장 분위기는 실로 부조화 그 자체였다. 안와르 콩고는 이곳에서도 자신의 획기적인 살해 방법에 대해 자랑했고, 이에 대해 아나운서는 존경의 눈빛을 담아 그대의 노력 덕에 우리 사회가 안전해졌음을 칭송했고, 군복 비슷한 단체복을 차려입은 조폭들(그러니까 청년단)은 방청석에 앉아 환호와 박수소리로 대답했다. 공중파 방송의 주인공이 조폭 대장이며, 주제가 숙청과 폭력이고, 방청객들은 무분별한 범죄자들인데 어찌하여 이 방송은 이렇게 밝고 명랑한 분위기일 수 있는 것인지, 이 영화는 정말 '극'이 아닌 '사실'을 담은 것일까 하고 의심스러웠던 부분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영화가 안와르 콩고의 개인에 초점을 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안와르 콩고 같은 깡패들 말고, 실권을 잡은 정치인들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정말 기가 찼던 장면은 부통령의 연설 장면이었다. 동네 양아치도 아니고, 한 나라의 부통령이 조폭(청년단) 행사에 연사로 나서서 여러분 덕에 국가를 지켜낼 수 있었다고 추켜세우는 연설을 한다. 요컨대, '군과 경찰의 힘만으로는 나라의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 주먹은 필연적이고, 그때는 주저 말고 써야 하는 법이다.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쯤 되겠다.


 또 다른 인물들은 어떠한가, 안와르 콩고의 동료들, 아마 당시 간부 역할을 했던 것 같은 동료들은 오랜만에 모여 과거를 회상 했고, 키득키득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십 대 소녀를 강간하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고, 지금은 그럴 수 없어서 아쉽다며 추억에 젖었다.


 안와르 콩고를 큰 형님쯤으로 모시고 따르는 헤르만도 비중 있는 역할을 한다. 전형적인 동네 양아치인데, 동네 사람들에게 보호세 따위를 뜯는 일을 한다. 그는 국회의원에 출마해 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출마한다. 유세 과정에서 시민들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시민들은 본인들을 괴롭히던 헤르만에게 친숙하게 인사를 건넸고, 어째서 공짜 티셔츠나 선물을 안 주냐고 따지기까지 했다. 헤르만은 그럴만한 돈이 없었고, 결국은 다른 후보가 당선되었다. 안와르 콩고는 일찌감치 헤르만이 질 것임을 알았고 이를 안타까워했는데, 헤르만이 공짜 선물을 넉넉히 마련할 만큼 부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 대학살 이후 5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역사가 청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면 속 시민들의 모습은 기형적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정말로 이 영화가 극이 아닌 다큐멘터리인가를 놓고 여러 차례 확인했다. 영화에 담긴 내용이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사실이라고 한다.


 이 용감한 고발에 대해 세계의 영화제와 평론가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 또한 감독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싶은데, 위태로울 수 있는 자신의 안전을 뒤로하고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주제를 국제 사회에 알린 용기를 높이 사기 때문이다. 자신의 나라도 아닌 타인의 나라에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갖고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그의 용기는 본받을 만한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불쾌했다. 몹시 불쾌했다.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 등으로 영화의 막바지를 지켜보면서는 역겨움까지 느꼈다.

 표면적으로 잔인한 장면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도 그 역겨움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컸던 것 같다. 영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았을 것 같은데, 이 불쾌함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모르겠다. 감수성이 큰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지 걱정이다.



 이 영화의 목적이 이데올로기를 다루거나, 특정 정파의 문제를 꼬집기 위함은 아닌 것 같다. 한두 명의 개인을 고발하기 위한 것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야만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안와르 콩고 같은 깡패들은 순진하다.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뿐이다. 성욕이 당기면 소녀를 강간했고, 돈을 뺏고 싶으면 뺏었다. 더 힘 있는 자가 시키면 굴종했다. 이 깡패들은 권력의 사냥개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쿠데타가 성공하여 다른 주인이 다른 먹잇감을 사냥하라면 이 개들은 주저 없이 헌신했을 것이다.


 비슷한 일은 독일에서도,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있었다. 힘 있는 자들이 더 큰 권력을 잡으려 내전을 벌이는 동안 윤리와 질서는 기능을 잃었고, 이 틈을 타고 야만이 자라난 것이다. 아니, 권력자들이 야만을 키웠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냉전이니, 쿠데타니 하는 것들은 핑계다. 어차피 개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다.   

 공산당 박멸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윤리 따위 무시해도 좋다는 주인의 승인 하에 동네 개들은 사냥개가 되었고 학살을 시작했다.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집권자들은 윤리와 질서라는 속박을 풀어주었고 이들은 원시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원시의 인간은 잔인하고 포악했다. 때때로 원시 상태를 일종의 지상 낙원으로 그리는 낭만적인 관점도 있지만 이는 분명한 착각이다. 에덴동산은 어디까지나 판타지일 뿐이다. 유인원을 포함해 동물의 세계를 살펴보면 원시 인간의 행동을 짐작할 수 있다. 침팬지, 돌고래 등 지능적인 동물일수록 잔인함의 수준도 크다. 초기 인류의 두개골에는 깨어지고 아문 흔적들이 많은데 전쟁과 살상이 빈번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폭력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다. 하지만,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통해 우리가 우리의 공격적인 본능을 통제하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게 노력했는지 보여준다. 원시 상태에서 오늘날로 오기까지 우리 인간은 폭력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들을 끊임없이 고안해 냈다. 법, 윤리, 종교, 국가 등이 대표적이고,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오늘날에도 분명 끔찍한 범죄가 잃어 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인구수 대비 살인의 비율은 시간이 흐를수록 낮아졌다. 이는 문명의 큰 업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나치의 인종 청소나 중국의 문화혁명처럼 대규모 살상을 포함시키더라도 근 현대의 살상 비율은 과거의 살상 비율보다 적다. 그만큼 야만 사회에 가까울수록 인구수 대비 살인의 비중은 컸던 것이다.


 인간의 폭력성이 어쩔 수 없는 본성일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본성을 통제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아직 미완성이겠으나 그럼에도 그 성과는 상당히 크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이렇게 고발한다.

 우리가 힘들게 쌓아 올린 문명이라는 것을 벗겨놓았을 때 무지한 인간은 얼마나 야만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들에게서 문명이라는 속박을 풀어줌으로써 야만인이 되게 만든 권력자들을 보아야 한다. 영화는 줄곧 안와르 콩고 같은 무지한 야만인을 비추고 있지만, 실상은 이들에게서 문명을 벗겨낸 야만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안와르 콩고 같은 깡패들은 치밀하지도, 지능적이지도 않다. 사이코패스처럼 심리적 장애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손주를 예뻐하고, 개밥을 줄 땐 목에 가시가 걸릴까 손수 생선 가시를 발라주는 사람이다. 이들은 황당할 만큼 순진하고 정직하다. 물론, 영화를 보고 이들을 동정하거나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정당화하는 것은 한심한 짓이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반성하지 못할 만큼 무지한 자는 잠재적 악이다.

안와르 콩고는 인심 좋은 할아버지로만 보인다.


 대량 학살은 범세계적인 현상이다. 종교, 민족, 이데올로기 등을 핑계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악을 구분할 수 없는 무지한 야만인과 이들에게서 문명이라는 굴레를 벗겨준 영리한 자들은 범세계적이다. 인간의 잔인함과 폭력성이 어쩔 수 없는 본성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그래서 우리는 문명이라는 것을 쌓았다. 스스로를 구속하는 장치들을 만들었고, 불편하지만 잘 이용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 펑 하는 그 순간에 문명은 벗겨졌다. 영리하고 힘 있는 자들은 야만을 종용했고, 무지한 자들은 사냥개가 되었다.


 결국 영화는 아직 야만 상태에서 문명사회로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고발한다고 본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느꼈던 불쾌함은 아마도 야만 상태로의 추락이 얼마나 쉬운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느꼈던 공포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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