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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23. 2021

당신의 세계가 깨어지는 기분이 들 때

아이사와 리쿠, 호시 요리코, 2014

아이사와 리쿠, 호시 요리코, 2014
타인에게 마음 허락하는 것을 거부하는 14살 소녀, 아이사와 리쿠

“나는 상처 따위 받지 않았어!”


1. 오래전 합정동 인근의 한 서점에서 발견한 책이다. 홍보문구만 보고 가장된 따뜻함 속에서 시련을 겪는 주인공의 이야기인 줄 알고 덜컥 구매했지만, 실제 내용은 그와 반대였다.


2. 글만 잔뜩 있으면 5페이지만 봐도 잠이 오는 나는 만화가 결합된 그래픽 노블이 참 좋다. 아, 이건 그래픽 노블이 아니라 만화일까. 그래픽 노블과 만화의 차이는 글자 수인가. 아무튼, 배경 그림도 거의 없는 데다 인물 묘사도 등장인물 구분이 어려울 정도의 스케치 수준이고 말풍선도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혹은, 일부러 크게 그려서 배경을 가리는 듯하게 엉성하게 놓인 그림들을 보고 있자면 그림이 주어, 동사, 접속사 역할을 해주는 소설로 보였다.


예쁘장한 외모에 남다른 ‘아우라’까지 갖춘 완벽한 열네 살 소녀, 아이사와 리쿠. 친구들은 그녀를 특별한 존재라고 여겼고, 리쿠 역시 스스로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그녀에겐 비범한 특기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수도꼭지를 돌리 듯 자유자재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련되고 다정한데다 능력도 있는 아빠, 평범한 식재료도 갖은 신경을 써서 고르는 완벽주의자 주부 엄마. 언뜻 완벽해 보이는 가정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빠는 회사의 아르바이트생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엄마는 이를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못 본 척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빠의 불륜 상대 우치노를 집으로 초대하며 작은 소동이 벌어지지만, 겨우 별일 없이 마무리 되고. 엄마는 리쿠를 간사이 고모님 할머니댁으로 보내버린다. 도쿄를 떠나 강제로 시작된 간사이 생활. 수다스럽고 시끄러운 고모할머니네 가족들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간사이 사투리에 시달리는 리쿠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오는데….

[아이사와 리쿠 줄거리]


3. 아이사와 리쿠라는 중학생의 성장을 다룬 이야기이다. 리쿠가 겪는 성장의 서사는 엄마가 만들어준 세계에 살던 내가 집 밖으로 나가 세상엔 수만 가지의 삶의 방식이 있음을 깨닫게 되던 누구에게나 있던 그런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4. 꼬맹이였던 시절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자고 간 적이 있다. 당연히 우리 집과는 다른 방식으로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났다. 하룻밤뿐이었기에 나는 다음날 다시 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 친구와 밤새워 논 건 행복했지만 내가 지속해서 참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잦아지고 늘어갔다.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보내졌고, 알고 싶지 않은 일을 알게 됐고, 입고 싶지 않을 옷을 입어야 했다. 내가 없는 기분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똑바로 할 수 없다는 느낌으로 살아야 했다. 내가 옛날과는 다른 이곳에서 이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이것이 더 좋은 모습일지언정 진짜 나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즐거워하고 있지만, 이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지난 어린 시절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건 내가 아님이 틀림이 없다.



5. 하지만 더 나이가 들며 다시 생각해보는 건 정말 과거에 존재했던 내가 진짜 내 모습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내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상태는 정말 나에게 꼭 들어맞는 상태일까. 혹시 내가 정말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6. 조금 나이를 더 먹고 생각을 더 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혼자서 무언가를 이루기는커녕 어떠한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사람은 서로의 영향으로 살아간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지만 혼자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내가 스쳤던 많은 인연의 일부들이 나의 취향이 되고 나의 말투가 되어왔다. 내가 쓰는 이 글에도 지난주에 만났던 어떤 형의 습관이 들어 있고, 작년에 만났던 어떤 후배의 취향이 묻어있다.


7. 나의 세계가 깨져간다는 것은 바깥과 나의 관계를 정의하는 일이다. 그때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지금 이 글이 동의하게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게 된다.


8. 이 책에 등장하는 리쿠의 가족들은 모두 불완전하다. 모두 흠이 있고 탐탁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모두 이유가 있다. 그들의 모순된 행동들은 그 이유를 해결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답변이다.


9. 리쿠의 모순이 깨지게 한 것은 간사이 지방의 고모할머니 가족들이 보여주는 인간미이다. 이 책은 대체로 삭막한 도시에서의 사라져 가는 인간미를 아쉬워하며 과거 전통적 가족에서 느꼈던 향수를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10. 이제 소위 전통적 가족에 대한 향수랄게 없는 세대들이 사회에 대거 등장했다. 그들에게 있어 고향의 정취는 시멘트이고, 아스팔트이다. 전통적 가족은 지금의 세대가 참을 수 없는 지점들이 너무 많다. 분명 누군가는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희생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살아간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걸 겪어본 적 없으면서 이 세대는 이 삭막한 상황을 끝내고 무언가로 회귀하길 갈망한다. 막연한 일이다. 막상 겪어보면 학을 떼고 뒤도 돌아보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문제에는 그러한 관계에서만 채워질 수 있는 해결점이 있나 보다. 그럼 이 시대에, 이 세대는 그런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11. 리쿠는 결국 바닷가 보트와 보트 사이에 숨어 운다. 소리 내 진짜 울음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터트린다.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가짜 울음만 낼 수 있던 리쿠랑은 다른 일이다. 게 한 마리가 지나간다. 게는 리쿠가 뭘 하는지, 우는 이가 리쿠인지도 모를 것이다. 우리의 진심은 우연히도 수많은 게 앞에서 내비쳐지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리쿠의 울음이 중요한 건 그것이 진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그게 무엇인지 몰라주더라도 나에게 표현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면 그걸로 하나 해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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