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일기, 안미지, 2014
내 방에는 쓰지도 않는 오래된 물건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옛날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건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이상한 습관이다. 그중에서도 흔적이 담긴 건 더 버리기 힘들다.
꽤 오래전 언젠간 쓰겠지 하며 버리지 않던 수첩을 우연히 꺼냈다. 그속엔 유치원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그려준 둘리 그림이 있었다. 아버지 특유의 바른 정자체로 둘리 DOOLY라고 쓰여 있었고 둘리를 거의 닮지 않은 공룡은 메롱을 하고 있었다. 둘리를 그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랐을 것이다. 낙서에 대한 이야기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그림을 그리던 30대의 아버지도, 그림을 보고 있던 6살의 나도, 노트 외에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은 게 이상했다. 이상한 그 감정은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버리지 않기는 습관으로 굳었다.
이제 나에게 중요한 누군가의 흔적만 담겨있다면 휴짓조각에 그려진 낙서라도 버리지 못한다. 흔적은 이야기이다. 오래된 물건엔 그 세월만큼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나의 이상한 습관은 버리지 못한다를 넘어서 물건에 새겨진 이야기를 탐닉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 범위는 나의 바깥까지 확장되었다. 어렸을 땐 그렇게도 가기 싫었던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어딜 여행하던 지나치지 못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작은 서점에서 오빠일기라는 서점보다 더 작은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구매했다. 오빠가 아주 어렸을 때 쓴 일기들을 스캔하여 엮은 책이다. 어린이가 꾹꾹 눌러쓴 글씨와 그림이 가득했다. 그 누군가의 어렸을 적 일기처럼 일기를 쓰기 싫어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면 빼곡히 그날을 묘사한다. 문제지를 풀고 동생과 싸우고 친구와 놀고 맛있는 걸 먹는다. 사이사이엔 일기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사진들이 있다. 사진 속 남자아이는 포즈를 취하고 있기도 하고 울고 있기도 하고 자고 있기도 하다. 사진으로 오빠의 에피소드들은 더 현실감이 생긴다. 누구나 겪어봤지만 잊고 있던 귀여운 일상에 가슴 한켠이 훈훈해진다. 책이 거의 끝날 때쯤 뜬금없이 오빠가 군대에 있었을 때 엄마가 쓴 듯한 편지가 실려있고 그걸 넘겼더니 이런 숫자 나열이 적혀있었다.
코끝이 찡해진다. 다급히 다시 처음부터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훈훈함은 뭉클함으로, 저자의 귀여움은 엮은이의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 책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오래전 TV를 돌리다가 우연히 당시 인기가 높던 알쓸신잡을 봤다. 그날 처음 봤었는데 명성만큼 흥미롭고 몰입감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다섯 명의 패널은 한 지역을 정해놓고 각자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날은 경주편이었는데 그중 한 출연자가 소에 관련된 유물들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말하면서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말에 관련된 유물은 많다. 말은 전쟁을 위한 지배계급의 가축이다. 반면에 소는 밭을 가는 민중의 가축이다. 결국 민중의 삶은 남아있지 않고 우린 지배계급의 유물들만 보게 된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 멋짐으로 손에 꼽는 선배는 또다시 멋진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을 인터뷰하며 확실한 레시피 없이 구전되는, 풍요롭게 살 게 된 지금은 먹지도 않는, 볼품까지 없는 옛날 음식을 영상에 담는 일이었다. 선배가 다루는 대부분의 음식은 인터뷰이가 돌아가시면 이제 지구상에서 없어질 음식이 될 거라고 했다. 선배는 레시피뿐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었고 한 민족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비비안 마이어라는 사람을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우연히 15만 통이나 되는 멋진 사진을 발견하게 된 한 남자는 이 사진들을 남긴 사람을 찾고 싶어 한다. 갖은 노력 끝에 겨우 찾은 작가의 이름은 비비안 마이어. 그는 평생을 유모로 살았던, 아무도 아니었던 그 누군가였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며 살다가 혼자 세상을 떴다. 그녀를 찾아가는 주인공이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는 증언은 이것이었다.
그녀가 그런 줄 몰랐다
이 영화는 그가 살았던 그 당시에도, 그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지금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었다.
결국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주류의 역사다. 성공한 것만 기록되고 승리한 사람의 이름만 쓰인다. 그 외의 것은 몇몇의 기억에만 남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한 사람이 산다는 것은 엄청난 일임을 우리는 매일 경험한다. 내일 당장 기다리고 있는 삶의 고난만 생각해도 짜릿하다. 살아내는 모든 것의 생은 그 자체로 훌륭한 책이고 드라마틱한 영화이다. 모든 이가 같은 전개는 한 가지도 없이 다르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남아야 한다면 모든 삶의 걸음은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지금 기록하는 이 글도 버리지 못하는 내 삶의 파편으로 남을 테다. 아무도 기억하지도, 기록하지도 않는 일들을 남기는 일이다.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듯 오래된 기억도 버리지 못하고 싶다. 기록하고 남기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