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열등감
"친애하는 예술가이자 친구여, 당신의 결혼이라는 기쁜 소식에 대해 진심 어린 축하를 이렇게 늦게 전하게 된 점 용서 바랍니다. 잘 알다시피, 저는 [가난하고 골치 아픈 존재]로, 제 시간을 제 뜻대로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지인 Willion Mason에게 보낸 편지 중
"친애하는 M. 브로 씨, 내일 월요일 6시경에 저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오신다면 아주 기쁠 것입니다. 훌륭한 식사를 약속드릴 수는 없지만, 그건 [가난한 예술가들의 일]이 아니니까요".
지인 Alphonse Brot에게 쓴 편지 중
"제 인생은 이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상태에서 정녕 벗어나지 못할까요? 헌신으로 바친 시간들 그리고 당당히 남자답게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까요? 저는 언제까지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응접실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끝없이 매여 있는 걸까요? 제 [초라하고 겸손한 운명]이 어떻게 되든, 제 마음을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가톨릭 교회 신부 Lamennais에게 쓴 편지 중
19세기 예술계를 흔들고 지금까지도 위대한 음악가로 손꼽히는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가 그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곳곳에서 그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힘든 마음이었는지가 아주 조금은 전해진다.
“가난하고 골치 아픈 존재”
“가난한 예술가들의 일”
“초라하고 겸손한 운명”
그 위대한 예술가가 스스로에 대해 정의한 표현이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리스트조차 자신에 대해 '골치 아픈 존재' '초라하고 겸손한 운명'이라 칭했다는 것이 조금은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의 이런 낙심 뒤에는 '가난'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위 그림은 화가 Josef Danhuaser의 <피아노 치는 리스트>라는 그림이다.
프란츠 리스트가 파리의 살롱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 그림에는 여러 예술가들이 등장한다. 상상 속의 모임에 앉아 있는 알렉산드르 뒤마 아버지, 쇼팽의 연인이지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 리스트의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마리 다굴트가 있고, 서 있는 사람으로는 음악가 베를리오즈 위대한 문인 빅토르 위고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진 파가니니와 음악가 로시니가 있다. 벽에는 시인 바이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왼쪽 끝에는 잔 다르크의 동상이 있다.
당시에는 예술가와 문인들 간의 살롱문화가 왕성했기에, 이 그림이 참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다. 정말 시간 여행을 떠날 수만 있다면 당장 저곳으로 단 한 시간만이라도 떠나보고 싶은 낭만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하다 생각했다.
이런 생각 속에 슬픔이나 서글픈 감정은 결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리스트가 그가 존경했던 신부님께 보낸 편지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헌신으로 바친 시간들 그리고 당당히 남자답게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까요?
저는 언제까지 [어릿광대 노릇을 하며 응접실에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에 끝없이 매여 있어야 하는 걸까요? “
멋진 대저택의 응접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 흔들어 댄 주인공 리스트지만, 피아노 앞에 앉은 그 매력적인 모습 뒤에 화가의 붓 끝이 미처 전하지 못했던 그의 속 마음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질은 때때로 사람을 이유 없는 죄인처럼 만들곤 한다.
축해해야 할 자리에 어디선가 후원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참석하지 못해서,
더 좋은 식사에 초대하지 못했기에 미안하고 당당할 수 없었던 그의 고백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란 많아도 늘 부족하지만 적으면 죄인이 되기도 한다.
이 나이가 되니 나 또한 그의 이러한 고백이 낯설지 않아 왠지 모를 서글픔과 위안이 동시에 전해진다.
긴 시간 모든 열정으로 쏟아부어 만들어 낸 작품이었지만, 그 헌신의 시간이 이토록 멋지고 똑똑한 한 남자를 호탕하고 위풍당당한 남성으로 세워주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그의 음악과 연주를 사랑했지만, 그는 늘 대중의 사랑과 귀족의 후원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다는 허점 아닌 허점이 있었고, 그런 자신을 어릿광대에 비유한다.
모두에게 박수를 받는 순간이 때로 누군가에게 어릿광대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저마다 그 비밀스러운 순간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말없는 비밀로 남겨두곤 한다.
그리고 그때 내면에서 지극히 비밀스럽게 끓어오르는 감정, 열등감을 비로소 경험한다.
무언가를 이루어 가는 것 그 긴긴 시간 가운데 불어오는 비바람을 견디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묵묵히 흔들리지 않고 지켜가는 것이란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인가 보다. 열등감이라 불리는 이 감정과 우리가 친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도 환영해! 열등감
프란츠 리스트 위안 3번 작품 172번, 선우예권 연주
Franz Liszt - Consolation No.3 S.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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