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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am Feb 06. 2023

밥그릇의 든든함과 섬세함의 대하여

캠핑의 물건들 001_스노우피크 시에라컵

아웃도어에서 밥그릇, 참 중요하다. 다 써보진 않았지만 몇 번의 실패를 거쳐 안착한 스노우피크  스테인리스 시에라컵.



밥그릇이다. 국그릇이기도 하고 커피잔이기도 하며 맥주잔이기도 하다. 사실은 물을 끓이거나 달걀을 지져 먹을 수도 있는, 그러니까 초소형 코펠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걱이나 국자로 쓰이기도 한다. 야외에서는 ‘원 기어 멀티 유즈’가 필수니까. 그냥 그릇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바닥에서는 ‘시에라컵’이라고 부른다. 아는 사람 다 아는 존 뮤어 John Muir 선생이 만든 미국의 시에라클럽이 활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생김새와 쓰임새가 기가 막혀 그 뒤로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거의 모든 브랜드에서 시에라컵을 만든다. 서너 개의 모델을 거쳐서 스노우피크의 시에라컵에 안착했다. 없는 시절에 스노우피크가 써보고 싶어 샀는데 지금까지 아주 만족하며 쓰고 있다. 저건 스테인리스 버전이고 티타늄 버전도 있다. 내게도 하나 있다. 아내가 쓸 시에라컵으로 티타늄 버전을 샀고 나와 아이들 것은 스테인리스 재질로 했다. 티타늄 시에라컵은 무게감이 없어 손에 착 감기지 않아 아내용, 접대용으로 두고 저는 스테인리스 컵을 쓴다.


6년 가까이 쓰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건 드는 데 힘이 들지 않는단 거다. 저 손잡이는 집게손가락으로 잡고 세 번째 손가락으로 받쳐주기에 아주 좋다. 컵을 한 바퀴 두르고 빠져나온 프레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모아져 집게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 고스란히 고정된다. 보통은 꼭 쥐거나 엄지로 눌러야 하는데 이건 끄트머리가 살짝 꺾여 세 번째 손가락으로 지지하면 된다. 덕분에 엄지손가락은 자유를 얻어 시에라컵을 든 채 맥주캔을 쥘 수도 있다. 시에라컵을 든 채로 맥주를 마시고 시에라컵을 쥔 손에 맥주를 옮기고 시에라컵 속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라면이든 만두든 과일이든 말이다. 별 것 아니지만, 백패킹이나 장거리 트레일에서는 꽤 유용하다. 테이블 없이도 반주 곁들인 식사를 할 수 있으니까.


처음엔 양이 불만이었다. 보다시피 200ml가 조금 넘는다. 200ml 정도 담으라는 건데, 참고로 설명서의 용량은 310이다. 가득 담으면 310ml인가 보다. 근데 밥이든 라면이든 먹기엔 너무 작다. 쓰다가 알았다, 딱 반 그릇 분량이구나. 밥이나 라면은 딱 두 번 먹으면 적당한 양이 되겠다. 적게 드시는 분들은 한 번 드시면 되고. 허기가 많이 졌거나 먹고 할 게 많다면 세 번 먹으면 된다. 적으면 더 먹고 많으면 덜면 되는 건 세상 모든 그릇이 마찬가지 아니냐 하겠지만, 음식을 덜 땐 아무래도 가득 채우기 마련이라서 그런다. 내게만 맞는 양일 수도 있다. 양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최근에 알았다. 우리 집 밥그릇(조금 큰 편이긴 하지만)이 400ml 조금 넘는다는 걸.


또 하나의 디테일은 바닥과 측면 월의 각도다. 다른 브랜드의 시에라컵들을 보면 직각에 가까운 것도 있고 더 접시 모양으로 퍼진 것도 있다. 근데 나는 이게 딱 좋았다. 여러 개를 포개기 좋을 정도로 벌어져 있고 음식을 담기 좋을 정도로 깊기도 하고. 우리 음식이 접시보다는 그릇에 어울리니까. 덧붙이자면, 직각에 가까우면 설거지가 어렵다. 백패킹을 할 때는 물로 그릇을 헹궈 마신 다음 티슈로 닦는 게 설거지인데, 깨끗하게 닦이지 않는다. 이건 잘 닦인다.


손잡이를 접을 수 있는 시에라컵들도 있다. 고정 장치들이 좋아 쓰다가 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시에라컵 하나를 수납한다면 접이식이 편하겠지만 이 녀석도 끝이 접혀 있어 큰 차이는 없다. 오히려 끝이 구부러져 카라비너 없이도 줄이나 어딘가에 걸거나 널 수 있어 편하다. 여러 개를 보관하기에는 오히려 포개 보관하는 스태깅이 낫다. 단독으로 수납할 때도 손잡이가 번거로웠던 적은 없었다.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눈금이다. 나는 오른손잡이라 왼손으로 컵을 잡고 오른손으로 음료나 음식을 따르는데 그러면 눈금이 나를 등지고 있어 보이질 않는다. 왼손잡이이신 분들은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디자인해야 한다는 건 아닌데 이유가 있나 궁금하긴 하다. 손잡이의 디테일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찾아보고 물어봤는데 아직 답을 못 찾았다.



아래 엎어진 게 티타늄 버전. 스테인리스 버전과 생김새와 크기가 같아 잘 포개진다.



아마도 앞으로 이 시에라컵을 계속 쓸 것 같다. 오리지널 시에라컵을 구할 기회가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사겠지만, 그러기 전에는 이 녀석을 곁에 두려 한다. 보고 있으면 기분 좋고 손에 들면 믿음직하거든. 잃어버리지만 않는다면 한 세월 흘러 상처 가득한 이 컵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 컵과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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