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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am Feb 06. 2023

변치 않는 원형과 끝없는 진화

캠핑의 물건들 000  prologue_버너 헤드를 닦다가

오래 전 캠핑을 시작하면서 캠핑에 필요한 장비들을 하나둘 샀는데 처음 산 게 스토브였다. 필요한 건 많았지만 꼭 필요한 순서를 정해야 했다면 스토브가 1순위였다. 고기를 구워야 했으니까. 블루스타는 캠퍼가 아니라 행락객을 위한 아이템 같았고, 캠퍼라면 알파인 가스를 쓰는 스토브가 있어야 했다.


스토브 전에 산 건 등산화와 배낭밖에 없었다. 캠핑 입문 전에 당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신발과 배낭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 배낭과 스토브는 함께 샀을 거다. 시내버스 타고 북한산만 오르다가 처음 지리산을 갈 때 동대문 어느 장비점에서 샀을 테니까. 이제는 나오지 않는 써미트의 물방울형 배낭 '하이랜드 45'와 지금도 나오는 코베아의 'TKB-8712'다. 신발은 K2 등산화였는데 3만원 남짓한 가격이었고, 오래 신지 않아 밑창이 삭아서 얼마 전에 버렸다.


배낭은 시간 지나 안에 코팅이 벗겨지고 망가져 버렸고, 스토브는 헤드가 깨져 가스가 샐 때까지 쓰다가 똑같은 모델을 다시 구입해 아직도 쓰고 있다. 나의 스토브 라인업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거나 가장 많이 쓰진 않으나 가장 정이 가는 모델이고, 가장 많이 만지작거리면서 들여다 보는 녀석이다. 


이 녀석은 무겁다. 뒤에 따로 소개하겠지만, 구조가 비효율적이어서 크고 무겁다. 대신 화구가 넓어서 여럿이 캠핑을 하거나 프라이팬을 사용할 때 좋다. 비효율적인 구조는 이 모델이 1987년에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찮은 단점이다. 가스 스토브로는 세계적으로도 초기 모델에 속하는 만큼, 이 모델을 토대로 작고 가벼운 게다가 화력도 좋은 모델들이 나왔을 테니까.


스토브를 여럿 가지고 있지만 이 녀석 역시 꾸준히 사용했다. 덕분에 두 번째로 들인 녀석까지 화구에 녹과 때가 덕지덕지 끼었다. 장비를 정리하다가 이 녀석을 발견하곤 한참 바라봤다. '네가 고생이 많았지' 싶어 꺼내서 살피다가 헤드를 좀 닦아줘야겠다 싶었다. 닦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군더더기를 떼어내주고 싶어졌다. 버너 헤드에서 냄비 받침대와 받침대를 받치는 판과 판을 받치는 스프링(어지간히 비효율적인 구조로다)을 떼어버렸다.

코베아의 초기 가스 스토브 TKB-8712의 헤드. 7~8년 묵은 때를 벗기고 

몇 년만에 이발하고 면도한 것처럼 낡은 스토브 헤드가 산뜻해졌다. 광택제로 몇 차례 더 닦으니 오랜 사용감은 그대로되 오염 아닌 흔적으로 바뀌었다. 잘 길든 오랜 가죽처럼. 그렇다고 사용할 때 사리진 않겠지만 간혹 손을 보고 정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스토브뿐 아니라 다른 나의 캠핑 장비들도.


캠핑은 자연과 마주하는 일이고, 자연은 때론 봄바람처럼 부드럽지만 또 때론 소백산 큰바람처럼 아주 매워서 좋은 장비를 필요로 한다. 하다 보면 캠핑을 위해 장비를 들이는지, 장비를 들이려고 캠핑을 하는지 헷갈리기도 한다. 어쩌면 둘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의 캠핑을 위한 것일 테니.


어떤 장비와는 돈독한 우정을 쌓기도 하고, 어떤 장비에게는 목숨일 빚지기도 했다. 또 어떤 장비는 어딘가 혹은 누군가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직 내 곁에 없는 어떤 장비는 나의 간절한 염원을 지니기도 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여러 장비들 중 내가 좋아하고 의지하는 장비 이야기를 하려 한다. 최고의 명품도 아니고 아주 고가도 아니다. 어떤 기회에 내게 와  내 캠핑의 일부가 된 장비들 이야기다. 어지간하면 아쉬워도 적응해서 쓰는 편이라 요즘 더 좋은 스펙의 장비들이 많음에도 그냥 손에 익은 내 물건을 사용하는 편이다.


카테고리를 나누자면 대략 세 가지다.


불놀이에 관한 것. 불은 캠핑의 원형이자 이유다. 170만 년 전 불을 처음 사용했다는 호모 에렉투스와 지금 캠핑장에서 캠핑을 즐기는 현대인 사이에 공통점이 불 말고 또 있을까. 불이 제공하던 빛은 조명으로 대체됐고 이제는 열을 취하기 위한 불이 남아 있다. 그래선지 화로대든 스토브든 불과 관련된 아이템들은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 관심이 가는 건 사곤 한다. 원형은 그대로되 끝없이 진화하는 과정을 들여다 보는 건 즐겁다.


두 번째는 커피에 관한 것. 커피를 좋아해서 집에서도 커피를 내려 먹거나 에스프레소로 뽑아 먹는다. 가끔 집에서 가스레인지나 캠핑장의 숯불에 생두를 볶기도 하나 결과는 성공보다 실패에 가까웠다. 그래도 커피는 아주 좋아해서 커피에 관련된 도구나 콘텐츠도 관심이 많다. 간편함과 맛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그래서 앞으로 10년은 너끈히 즐길 수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세 번째는 나머지. 스토브와 커피보다 더 중요한 텐트, 침낭, 매트리스, 코펠, 나이프, 도끼, 랜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재미로 읽으면서 '너는 그랬구나, 그럴 수 있겠네' 정도로 받아들여기길 희망한다. 가이드로 삼기에는 경험의 폭이 너무 좁다. 거꾸로 말하자면 불과 커피에 관련된 건 어지간한 가이드 역할은 할 것이다. 나 역시 나의 장비 리스트가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풍성한 장비가 곧 풍성한 캠핑인 건 아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캠핑을 안전하게 즐기는 거다. 그러기 위해 장비를 잘 다뤄야 하고 그러려면 잘 알아야 한다. 각자의 캠핑 스타일이 다르듯 각자의 캠핑에 필요한 아이템 리스트 또한 다르다. 그러니 내 장비를 아끼고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를 따르시오' 외칠 주제는 아니나 고민하는 이에게 '이 정도면 도움이 좀 될 것이오' 옆구리를 찌를 순 있겠다. 모두의 캠핑이 안전하고 즐겁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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