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인 인간에게 문명 사회와 질서의 함의를 던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 인간은 인간에게 있어 늑대이다.” 17세기 철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토머스 홉스는 무정부 상태에서 본능적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을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문명 사회는 약속과 질서를 기반으로 체제를 유지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억제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은 오로지 법과 공동체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를 행사할 수 있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할 경우 법적 처벌을 통해 응징을 받는다. 골딩은 홉스가 말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사회적 겉치레를 벗어던진 인간 본성에 내재한 폭력성, 추악함과 그로 인해 야기된 공동체적 갈등을 우화적 소설의 형식을 빌려 독자를 이 악몽의 섬으로 초대한다.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요약해보자면 핵전쟁으로 인해 다수의 소년들을 태우고 태평양을 건너 대피 중이던 항공기가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어느 이름 모를 섬에 불시착하는 것으로 스토리는 전개된다. 간신히 추락 직전의 비행기 안에서 탈출해 생명을 건지게 된 이 소년들의 나이는 전부 7~12세까지의 남자로만 구성되어 있을 뿐이고 성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인원들 내에서 다수결 투표를 진행하여 첫 리더로 선출된 랠프는 잘생기고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이고 이와 더불어 지도자로서의 출중한 능력도 갖춘 인물이다.
랠프는 구조되기 위해 봉화를 피우는 작업을 가장 중요시 여기며 권위를 의미하는 소라를 불어 회합을 소집하며 섬 내의 가능한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만들고 이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그의 곁에는 근시에 뚱뚱한 몸을 가졌고 육체적 능력은 다소 모자라지만 뛰어난 창의력과 지식을 가진 모두에게 ‘돼지’ 로 불리는 소년이 있다. 이 소년은 랠프에게 있어 중요한 책사의 역할을 하며 그가 지도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구체적 실천 방법과 의견을 가감 없이 표명한다.
이 소년들의 그룹 내에는 랠프나 돼지의 그룹과 달리 소라를 통한 회합의 질서, 봉화를 통한 섬의 탈출 임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맹목적인 사냥을 통해 자신의 권력 유지와 말초적 본성의 갈증을 달래는 ‘잭’ 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봉화를 올리는 임무를 소홀히 할뿐더러 질서를 파괴하며 공동체의 규칙을 하나둘씩 아무렇지 않게 허물어버리는 그는 리더 랠프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랠프 곁의 돼지와 같이 잭의 곁에는 이 소설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사형 집행인 로저가 있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중 가장 잔학하고 포악한 행위를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나중에는 바위를 굴려 돼지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인물이다.
돼지보다 먼저 죽음에 이르게 된 랠프의 무리 중 하나인 ‘사이먼’ 은 일종의 선지자이자 순교자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명상과 같은 고차원적인 활동을 즐기며 다른 소년과는 차별된 이성과 사리분별 능력을 가지고 있던 그는 소년 집단 모두를 늘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봉화 근처의 흉측한 귀신이 사실은 낙하산에 매달려 있는 시체에 불과함을 깨닫고, 악천후의 기상 이변 속에서 광란의 춤을 통한 의식 행위를 벌이고 있던 잭의 무리들에게 뛰어가 이를 알리려 하지만 이미 늑대가 되어버린 이들은 이성을 잃고 사이먼을 잔인하게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이먼과 돼지의 살인을 통해 이미 늑대가 되어버린 잭의 무리에게 끝없이 쫓기며 생명의 불씨를 간신히 유지해오던 랠프는 섬의 모래밭에서 뜻밖의 구원자를 만난다. 잭 일당의 무차별 방화로 인해 사방이 온통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하자 섬의 검은 연기를 발견하고 섬에 도착한 해군 장교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끝없이 타들어가는 섬의 배경을 뒤로한 채 랠프와 잭의 무리들은 자신의 구원자들 앞에서 자신들이 이곳에서 스스로 짓밟고 태워버린 천진성과 순수함, 인간다움의 상실을 절규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등장인물이 전부 만 7~12세의 어린 소년들이고 여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야만적인 성적 충동과 갈등의 서사적 요소에 한계가 있었던 점은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원시적이고도 야만적이며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타락해야만 가능한 인간의 악행은 성범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소되지 않는 성적 욕구와 맞물려 그들의 야만적 충동이 과도한 폭력을 부추겼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와 관련된 단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섬에 조난당한 소년들의 흔한 스토리 전개를 통해 문명, 사회, 규범과 질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한 작가의 노력과 고찰적 요소들은 충분히 감탄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