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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패커 에지 Feb 12. 2024

이제 서로 친해지려는데...

팀원의 사고. 슬픔은 익숙해 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날은 주재원 부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아직은 쌀쌀했던 금요일이었다. 

퇴근하고 나서 일치감치 집에 와서 주말에 뭐 할까 생각하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징 하는 진동 소리에 한통의 짧은 위챗(wechat)이 왔다. 

'책임님. Z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갔습니다' 

사고? 

팀원의 사고 소식에 최초로 연락이 온 친구와 서툰 중국어로 이야기하다 보니 본인도 잘 모르는데 다쳐서 병원으로 간 것 같다고 일단 보고 한다는 말이었다. 늦은 시간이라서 내일쯤 소식이 오면 연락을 주겠다는 말고 함께 전화를 끊길래 병원은 물어보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와이프는 내일 연락 오고 치료받고 좀 진정되면 천천히 가보지라는 말을 했지만 이제 직원들에 대해 알아가고 있고 거기에 Z는 우리 팀에서도 막내여서 신경이 좀 더 쓰인 것도 있었겠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집을 나서게 됐다. 

연락이 온 중국 직원에게 병원은 어디냐고 채팅을 하고 물어보니 집에서 차로 10여분 가면 되는 곳이라 가면 누가 있나 직원이 함께 있는 건가? 아니야 너는 일부러는 안 와도 돼. 올 거야? 그러면 Y병원에서 안으로 가서 연락할게 이런 대화들을 하면서 갔다. 

병원은 코로나로 인한 여파가 있었던지라 착 가라앉은 분위기와 함께 통행도 제한되다 보니 아직 적응도 못한 외국인지 들어가기도 힘들고 건물밖에서 직원들과 연락되기를 기다리면서 서성이고 있었다. 

'책임님 병원을 옮기는 것 같아요. 제가 곧 Y 병원에 도착해요'

병원을 옮길 것 같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코로나라서 병원이 진료를 안 해줘서 그런가 아니면 심하게 다쳤나 

'그럼 옮기는 병원을 알려주면 그리로 갈게 나 때문에 이리로 올 필요는 없어요.'

괜히 빨리 와서 여러 명 번거롭게 하는 건가 싶어서 안절부절못할 때쯤 직원이 도착했다. 

그러고 나니 몇 명의 회사직원들과 내 밑의 직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가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신호등이 없는 큰길 횡단보도를 마지막으로 건너다 차에 부딪히는 사고가 났고 그로 인해서 위중한 상태였다. 

좀 더 상급병원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상태가 위중해 이송을 하려다 다시 돌아와서 응급수술 중이라는 것이었다. 눈앞이 하얘지고 다리가 떨리고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어지러움증을 느꼈다. 사고가 나고 같이 있던 친구들은 이미 몸을 떨고 있었고 직원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자기들끼리 언성만 높이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었고 외국인이고 말도 정확하게 소통이 되지 않으며, 중국에 대한 이해도 없었지만, 

나는 그들의 리더역할을 하는 사람이었고 선배이자 형, 오빠 이기도 했다. 냉정을 찾아야만 했다. 

이곳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회사 총무와 인사에 일어난 일에 대해 시간순, 현재 현황을 연락을 보냈다. 

순차적으로 주재원과 현지인원들이 부서별로 속속들이 도착을 하고 일부는 경찰들과 조서를 위한 지원을, 다른 인원은 회사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보험 관련을 그리고 부모님 연락처를 알아내어 연락을 드리게 되었다. 




응급실 앞. 작은 공간에서 지정된 인원만 들어갈 수 있어 밤을 새우고 있었다. 

정확하게 조금은 냉정하게 상황을 다른 주재원과 스텝 직원들에게 전달해 줄 책임자가 있어야 해서 자진해서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냉정할 수는 없었다. 의사가 잠시 나와서 머라 이야기하고 들어가면 통역을 해서 듣는데 통역을 하는 친구가 말을 잘하지 못하고 나도 더 냉정하게 워딩을 물어볼 수 없었다.  

'부모님은 도대체 언제 오신다는 거예요?'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전하여야 했기에 직원한테 말해 전화를 드렸고 2시간가량 걸린다고 들었지만 시간이 속절없이 흐를 때까지 오시지 않았다. 다시 전화해 보라고 몇 번을 재촉해서 아버님과 통화를 했다고 했는데 아버님이 어머니는 놀라니 이야기하지 말고 나는 좀 있다 도착할 거다라는 이야기만 반복하셨다고 한다.  외동딸의 충격적인 소식에 너무 서둘러 오시다가 사고라도 난 건 진짜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서 다시 전화해 봐라 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전화를 드리니 뭔가 달랐다. 전화드린 직원이 다른 전화기로 다시 전화하고 받고를 몇 번을 반복하고 통화를 마친 다음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눈물과 헛웃음이 함께 나왔다. 

아버님은 최초 전화를 받았을 때 보이스피싱인 줄 아셨던 거다. 그래서 대답은 대충 해 놓고 그냥 있으셨던 거고 늦은 시간이라 딸에게 전화를 하는 확인도 안 해보고 그렇게 시간이 갔는데 몇 번을 전화가 오고 하니 따님의 전화기로 전화를 받아보라 걸어보라 이런저런 확인을 하시니 그제야 청천벽력 같은 믿기 싫었던 소식을 받아들이시게 된 것이었다. 시간은 너무 빨랐다. 부모님이 새벽이 다돼서야 도착하셨는데, 그전 의사가 몇 번을  다시 나왔고 부모님 도착 소식에 부모님과 몇 명만 들어와서 상태를 확인하셔야 된다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어서 나는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멍 했다. 인생을 그래도 살아오며 이런저런 슬픔과 아픔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중국은 사고 후 처리가 조금 다른 게 사고가 났어도 무조건 구속수사 이런 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사고를 낸 중국인 운전자와 부인이 (경찰에서 조서를 작성하고) 병원에 방문했다. 젊은 친구들이었다. 사고가 난 막내 Z 하고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그들은 이곳에서 병원비하고 이후에 우리로 따지면 합의금 아니 위로금에 해당하는 비용을 협의하러 온 것이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외동딸이 사고로 올 수 없는 강을 건넜는데, 너무나도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비용으로 처리하는 부분이 소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이 문화는 달라도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누군가 죽으면 애도하고 슬퍼하고 고의가 아닌 사고더라도 고인에게 그들의 가족에게 아픔을 덜어주려는 눈물과 사죄보다는 처리부터 하는 이런 풍경들이 너무나 이질적이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옆에 친구들한테 원래 그러는 거냐라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도 않았다. 

Z가 사고를 당했을 때 함께 있었던 B가 갑자기 가해자에게 소리를 치며 뛰쳐나갔다. 나도 같은 곳을 보고 있던 터라 즉각 반응해서 싸움은 말릴 수 있었지만 가해자의 와이프가 한 말은 아직 이해는 되지 않는다. 

'우리도 슬프로 괴로워요. 근데 당신이 이러는 건 도움이 안 돼요.'    

난 B의 슬픔과 분노에 더 공감했지만 말리고 안정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차분하게 장례가 화장으로 이루어졌다. 부모님과 우리 팀 동료들 그리고 스텝 부서분들과 참석하였지만 한국과는 달리 중국은 별도의 영결식 문화는 없었다. 화장을 하고 유골을 담은 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차량으로 이동을 했다. 아버님은 내게 우리 애를 이뻐해 주시고 마지막까지 잘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다. 난 그냥 아무 말도 드릴 수가 없었다. 고향을 떠나 취업을 하면서 부모님께 월급을 보내며 앞으로의 미래를 꿈꾸었을 귀여운 딸의 모습을 먼저 보내야 하는 그 상황에 누가 대답할수가 있을까. 

유골을 모신 차량은 먼저 직원숙소 짐을 챙기기 위해 떠났고 우리 팀은 회사로 복귀해서 마지막으로 그 친구의 유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서 박스 안에 넣었고 차량이 회사에 들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유품을 전달드렸다. 


유품 정리할 때 성격만큼이나 이쁘고 꼼꼼하게 작성한 메모지, 다이어리를 보고 나니 

그렇게 이쁜 웃음 지으면서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지 얼마 안돼서, 주재원으로 와서 중국 생활하려고 하는 나와 같은 동기라면서 자기가 잘 도와주겠다고 했던 성실하고 밝은 Z였는데 이제는 기억과 기록에서만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먹먹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지금 사고가 난 그곳은 신호등이 설치되고 신호 체계도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날 사고를 함께한 Z의 동기들은 심리치료도 받고 카운슬링을 회사에서도 꾸준히 진행하였다. 그러나 각각의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회사를 그만두었다. 젊은 나이로 함께 들어와서 함께 기뻐하던 친구의 죽음에 슬픔을 이겨내기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선가 훌훌 털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친구가 하늘에서 섭섭해하지 않게 가끔 한 번씩 잊지 않고 떠올려 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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