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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패커 에지 Feb 13. 2024

대충 얼머무린 말 한마디가 불러온 결혼식 축전

중알못이 중국직원 결혼식에 축전을 읽어주다

어느 날 아침. 

평범하게 출근을 하고서 루틴대로 따뜻한 물을 받아서 차 한잔 내려놓고 

다이어리에 이것저것 긁적이면서 업무포털에 로그인을 하고 메일을 스크롤 내려보면서 천천히 업무를 보려고 하는데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대부분 아침 시간에 오면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데 보고 하던지, 오늘 외근이 급하게 잡혔다던지 휴가를 써야 할 것 같다던지 정도다. 특히 짬이 있는 직원이 아닌 한국으로 치면 대리급 이하 직원들은 대부분이 그런 상황이다. 

오자마자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한다. 언뜻 결혼 단어가 나오기는 했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머 언제는 다 잘 알아들은 것도 아니니 대략 결혼이니까 휴가 내겠다는 거겠지 싶어서, '하오더 好的' 일명 오케이 같은 의미의 단어를 말하고 자세한 건 메일로 보내줘라 정도로 말하고 내 일을 봤다. 

 

중국 주재원은 간혹 우리끼리 우리는 중국어를 하는 게 아니고 콩글리쉬처럼 한중어(한국형중국어)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건 문법도 틀리겠지만 단어도 성조차이로 실제 밖의 일반 중국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국 회사에서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중국어는 이런 생활이 익숙한 직원들이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즉 짬이 조금 있는 직원들은 대략 단어와 눈빛을 조합해서 의미를 유추해 내고 본인들이 이야기나 설명을 해 줄 때에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급적 기초적인 단어들로 조합을 하고 여러 번 반복을 해서 이야기해 주게 된다. 그래서 팀의 막내급이나 경력사원으로 새롭게 입사한 중국 직원이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외국인임을 배려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든 편이다. 다만 일반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슈거리를 제외하고 뭔가 얼굴표정이 심각하지 않은 경우라면 흔히 짐작이 가능한 상황들이어서 단어 몇 개로 유추해서 긍정의 대답을 하고 메일이나 위챗으로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서 업무를 이어나가게 된다. 


며칠이 지나서 결혼식 청첩장을 들고 찾아왔다. 

'결혼 축하해요. 그날 참석 해서 팀원들과 같이 축하할게요.' 

이러면 그냥 '네' 하고 가야 하는데 뭔가 계속 이야기를 한다. 자기들이 준비를 뭘 해야 하는지 이런 내용인 거 같아서 본인들 결혼식에 멀 준비 하는 거지? 술? 음식? 그런 건 관계없는데. 

통역을 할 수 있는 직원을 불렀다. 이야기인즉슨 중국인들의 결혼식은 우리와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데 그중에 사회나 주례하고는 다르게 축전을 읽어 주는 식순이 있다. 대체로 자신들의 '링따오(리더)' 나 '라오스(선생님)' 같이 사회적으로 약간의 지위와 명예가 있는 사람들이 축하한다는 좋은 이야기 읽어주는 것이다. 

내가 그걸 왜? 이제야 기억이 났다. 며칠 전 찾아온 게 그걸 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고 나는 너무나도 친절하게 알겠어....라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하아.... 만약 지금이라면 조금 다를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주재원 부임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수업시간에 배운 중국어와 실생활 중국어의 갭을 몸으로 느끼고 나서는 자신감이 땅바닥을 뚫고 지하를 파내려 가고 있던 터라 그 많은 하객들 앞에서 중국어로 축전을 읽으라고? 그야말로 중국 실생활에서는 중알못(중국어를 알지 못하는)이 안 될 말이었다. 남의 소중한 잔치에 떠듬떠듬 읽어 내려가는 모습과 초점을 잃은 눈빛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니 이미 집안 어르신께도 다 말을 해 놓은 상황이고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이다 보니 외국계 업체에서 연구직으로 입사한 직원의 외국인 리더가 축전을 읽는다는 건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 다운 광경이라고 내 진짜 의사와는 다르게 이미 결정을 한 듯했다. 


일단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을 거고 또 그들만의 단어들이 있을 것 같아서 읽을 스크립트를 당사자에게 좀 써오라고 했다. 받아 들어 보니 역시나 모르는 단어 투성이에다가 병음도 나타나지 않아서 눈이 깜깜해졌다. 시간은 2일 정도밖에 여유가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한다. 

일단 병음을 붙인 버전을 (병음은 중국어로마표기법으로 중국어 한자를 영문화하여 읽을 수 있도록 작성하는 것) 중국어 위에 작성하였고, 그걸 기반으로 성조를 참조해서 몇 번을 읽고 연습하였다. 중국어 구술시험을 볼 때 그 고통이 다시 생각나는듯했다. 그때는 선생님, 심사관 앞에서만 하면 되는 건데 이번엔 그냥 중국인들 앞에서 해야 하니 이왕이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다. 몇 번 연습에 안 되는 단어나 문장은 다시 수정하고 그렇게 해서 당일이 되었다. 


코로나 통제가 있긴 했지만 행사를 막지는 않았던 때라 사람도 많이들 오셨다. 이제 다들 식사도 하시고 인사도 하시고 술도 한잔씩 하는데 막바지까지 멈출 수가 없었다. 단어를 끊어 읽을 곳, 잠깐 쉬면서 청중을 쳐다볼 타이밍 등등 엄청 고생했다고 생각한걸 제대로 해 보고 싶었다.  

병음에 띄어 읽기에 액션까지. 그러나 역시나 어려운 중국어.

이름이 호명이 되고 무대 위에서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떨면서 긴장한 부분들이 다 표현이 되었을 거고 결과는 많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나마 그리 큰 실수는 없었고 다행히 하객분들도 한국사람임을 나중에 인지를 해 주시니 뭔가 아 그래서 그랬구나 라는 느낌으로 그래도 노력을 했네 하는 표정이지 않으셨나 싶다. 물론 진실을 물어보고 싶은 용기는 들지 않았다. 


이렇게 중국에서 또 하나의 망신망 당할 뻔했던 일이 무사히 넘어가는 하루였다. 


또 직원 중에 누군가가 찾아와서 축전을 부탁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살짝 걱정도 되지만 다행히 그날 떨려하던 나를 본 친구들은 나를 배려해서인지 혹은 자기들 잔치를 아슬아슬하게 하기 싫어서인지 축전 부탁은 없었다는.... 

주재원으로 직원결혼식 참석은 내 작은 행동들이 더 크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생각보다 많은 긴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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