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해질 수 없지만 쿨해져야 한다.
조직에서 권력은 늘 사람에게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해외 주재 생활을 겪어보면 금방 알게 된다. 권력은 사람이 아니라 자리에 붙어 있고, 그 자리는 언제든지 예고 없이 이동할 수 있다. 누군가 오고, 누군가는 떠날 때 조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후임 주재원이 부임하면 조직 전체의 공기는 아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회의할 때 시선이 옮겨가고, 보고의 방향이 달라지고, 메시지의 수신자가 바뀐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사고과가 있다. 누가 평가하는가. 이 단순한 질문 하나가 조직의 긴장과 태도를 동시에 바꾼다.
내가 근무하던 시절, 중국 직원들의 인사고과는 분명 나의 책임이었다. 잘한 일은 기록했고, 부족한 부분은 여러 차례 피드백을 줬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평가가 갈렸다. 어떤 직원은 안정적인 신뢰를 쌓았고, 어떤 직원은 끝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평가는 개인감정이 아니라, 결과와 태도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평가 권한이 이동하는 순간, 그 기준 역시 리셋된다. 특히 내가 근무할 때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직원들에게 후임 주재원의 등장은 완전히 새로운 기회였다. 이전의 기록은 참고 자료일 뿐, 앞으로의 평가는 새 책임자의 시선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런 변화는 사실 주재원이 몇 명 바뀌는 동안 근무한 선임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어차피 4년 정도면 교체가 될 사람이니 딱 그 정도의 관계만 유지하려는 친구들도 있고 주재원 초년차에 본인이 기대하는 성과 고과를 받지 못하면 공개된 wechat 같은 프로필에 ‘이번 4년은 실패할 것 같아 ‘라는 글을 써 두고 겨우(?) 출퇴근만 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당연히 본인에게는 손해지만 또 그렇게도 굴러가는 게 현실이다.
실제로 이런 변화는 의외로 극적인 변화된 행동으로 바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전에는 회의에서 말수가 적고, 지시를 기다리던 직원이 있었다. 여러 차례 주도적인 역할을 요구했지만 큰 변화가 없었던 친구다. 그런데 후임이 부임한 이후, 그 직원은 회의 전에 먼저 안건을 정리해 공유했고, 후임에게 “본인이 개선하고 싶은 부분”을 직접 설명했다. 나와 함께 일할 때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태도였다.
또 다른 직원은 나의 기준에서는 성과 대비 태도가 가볍다고 느껴졌던 경우다. 보고는 빠르지만 깊이가 부족했고, 반복되는 지적에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후임 주재원에게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중국 현지 관행을 설명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면담을 하자며 찾은 자리에서는 이슈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가 더 잘할 수 있을지 같은 뭔가 어필을 가장한 대화의 기회를 만드는 친구가 있었다. 흔한 점심 자리에서 자신의 커리어 방향을 직접 프레젠테이션 했다. 그 모습은 분명 ‘새로운 인상을 만들기 위한 전략’에 가까웠다.
이런 장면들을 보며 처음에는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나에게는 왜 저렇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그들은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판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조직 안에서 평가는 곧 생존이다. 이전 평가자에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면, 새로운 평가자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나와 관계가 좋았고 안정적인 평가를 받던 직원들 중 일부는 오히려 조심스러워진다. 괜히 줄을 잘못 서는 것처럼 보일까 봐, 혹은 이전 책임자와 가깝다는 이유로 오해를 살까 봐 한 발 물러선다. 권력이 이동할 때 조직 안의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합리적인 거리를 계산한다.
이 시기를 지나며 분명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권력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라는 점이다. 이때 서운함을 드러내거나, 과거의 관계를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기 시작하면 결국 손해를 보는 쪽은 나 자신이다. 조직은 이미 다음 단계로 이동했는데, 혼자 이전 장면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전임자로서의 역할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남은 업무를 정돈하고, 판단의 맥락과 히스토리를 문서로 남기고, 후임이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설명해 준다. (직원 개인의 역량이 스스로 꾸준히 발전해 나가는 것과는 별개로) 조직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가장 프로페셔널한 태도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여유는 사람에게 쓰는 편이 훨씬 낫다. 인사고과와 무관하게 진짜로 친했던 중국 친구들, 지적하거나 좋은 고과를 받지 않았어도 늘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묵묵하게 근무해 주는 친구들, 퇴근 후 맥주를 마시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 나의 직함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과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다. 권한이 사라진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계만이 진짜라는 사실은, 이 시기에 가장 또렷하게 드러난다.
권력은 이동한다. 그것은 막을 수도, 붙잡을 수도 없다. 다만 그 이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태도로 정리하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담담하게 이해하고, 깔끔하게 물러나며, 필요한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쓰는 것. 그 선택이 주재 생활의 마지막 장을 성숙하게 만든다.
권력은 떠난다. 그러나 태도와 관계,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정리는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