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철 오목협회장-김홍순·박웅배·장원철 오목기사가 살아가는 세상
누군가는 말합니다.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으면 안돼, 그 순간 싫어지게 되거든." 하지만 여기, 미친듯이 취미를 쫓다 직업으로 혹은 인생의 제1 목표로 삼은 이들이 있습니다. '취미가 인생이 된 사람들'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편집자말>
난 게임 분야에선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 누구에게도 1등을 내어준 적이 없다. 오락실 게임부터 전략을 사용하는 게임까지, 한때 난 프로게이머를 꿈꾸었을 정도로 승부욕이 남달랐다. 그러다 6개월 전부터 오목을 두기 시작했다. 오목 역시 똑같았다. 하루 30판 이상 두던 나는 지인들 사이에서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 중에는 더 이상 상대할만한 적수가 없다고 느낀 나는 동네 기원을 찾았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당연히 오목도 잘 둘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나는 기원에서조차 '오목의 신'으로 거듭났다. '인간계'에서 최고수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고수들을 물색하던 중 제목부터 심상찮은 '한국오목협회'를 발견했다. 오목 대회가 아니면 모이지 않는다는 이들의 첫 모임이 열린다는 소식에 나는 당장 대회 참가를 신청했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의 심정이 이럴까. 자칭 '오목의 신'이란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렇게 난 전패했다. 대국 상대였던 김홍순 기사는 내가 세 번째 수를 뒀을 때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띠었다. 대국이 끝나자마자 "혹시 세 번째 수를 뒀을 때 승부가 정해진 거였냐"고 물었더니 그는 "네, 지는 수에 두셨습니다"라고 답했다. 세 번째 돌만으로 몇 수나 앞을 내다 본 것일까. 고작 6개월 된 내가 범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곳은 '신계'였다.
1800년대 렌주룰(흑을 잡는 사람이 삼삼, 사사, 육목 이상이 금수인 룰)이 만들어지면서, 세계에 오목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이텔, 천리안이 보급되던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오목 전략 연구가 시작되었다. 초창기엔 자신들에겐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각 지역 사람들이 PC방에서 직접 만나 대국을 펼쳤다. 이를 지켜보면서 전략 토론을 하다가 만들어진 모임이 지금의 '한국오목협회'로 이어졌다.
오목협회에 깜짝? 오목 프로 선수도 있다
▲ 권준철 한국 오목협회장(왼쪽)과 김홍순 오목 국가대표 기사. ⓒ 이희훈
협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오목 프로 선수가 있다. 조훈현, 이세돌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바둑 기사들이 있듯 오목계에도 그들 못지않은 인물들이 있다. 국내에선 오목협회장이 주최하거나 허가한 오목대회에서 4강 이내에 들면 오목 기사 자격증이 주어진다. 국내 대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오목의 고수들이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는, 세계 랭킹전 또한 있다. 2006년 '제2회 아시아 오목 챔피언십'에서는 한국 국적의 김창훈(8단)이 우승해 한국 오목의 위상을 높였다.
올해는 에스토니아에서 오목 세계대회(Renju and Gomoku World Championship 2019)가 열렸다(7월 31일~8월 10일). 약 11일간 진행되는 이번 대회에는 김홍순(5단), 장원철(3단), 박웅배(2단) 등 3명의 국가대표 오목 기사들이 나섰다. 이들은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 간 오목에 열정을 쏟았다.
더위가 찾아온 7월 중순 서울 구로구 아트바둑아카데미에서 만난 권준철 오목협회장과 김홍순 기사는 국내에서 오목이 저평가 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이 간단한 두뇌 회전용으로 하는 게임이 오목'이라는 인식이 오목을 바라보는 국내 시선"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래서인지 바둑과는 달리 기업 스폰서가 없어 자금 운영이 마땅치 않다고. 이 때문에 오목협회는 현재 회원들의 모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 선수들에게) 경비 전액을 지원해주고 싶었다. 현실적으로 1인당 경비가 150만 원 정도인데 국가 대표 선수들에게 30만 원 정도씩 지원이 가능한 상황이다."
권준철 오목협회장은 오목계의 열악한 현실에 대해 토로했다. 오목 국가대표 선수들은 자신의 사비를 털지 않으면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 오목협회는 오목판과 오목이 새겨진 텀블러, 티셔츠, 오목서적 등을 팔아 얻은 수익과 회원들에게 걷은 협회비(연간 3만 원)를 선수 육성과 대회 운영에 보태고 있었다.
권 협회장은 "협회가 출전 선수들을 위한 기본적인 역할을 하고 싶었다"면서 "150만 원 모두 지원해주고 싶었지만 많이 팔지 못했다. 바둑의 경우 스폰을 통해 기본적인 운영이 가능하지만 오목은 그게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아내와 아들 둘까지... 오목가족의 오목사랑
▲ 권준철 한국 오목협회장. ⓒ 이희훈
권 협회장은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M게임, 이후에는 네오위즈게임즈에서 보드게임 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두 곳에서 바둑, 장기, 오목 등과 관련된 개발-마케팅업무를 담당했다. 15년 정도를 게임회사에서 일했고 이런 직업을 택한 이유도 오목을 좋아해서다. 그에게 오목은 단순한 게임이 아닌 취미 이상의 것이었다.
"(오목은) 일단 처음에는 우습게 알고 시작하는데, 하면 할수록 오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서로 수 싸움을 하다가 상대방을 이겼을 때 희열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에 사람들이 빠져든다. 그러다보니, 한판을 두고 또 그 다음 판을 계속해서 둘 수밖에 없다. 그 맛을 아는 사람은 오목을 끊을 수가 없다."
권준철 협회장의 목소리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오목과 관련된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퍼져 있었다.
"(처음엔) 컴퓨터로 오목을 두기 시작했다. 채팅을 하다가 오목 한판 두자고 하면 그 방으로 우르르 들어가 대국을 다 함께 지켜봤다. 이 관계가 이어지자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 부근의 피시방에서 모였다. 당시에는 스타크래프트가 유행이었는데 우리들이 30명 정도 우르르 가서 단체로 오목을 밤새 두다 보니 피시방 사장이 저희에겐 1시간에 1000원이 아닌 500원으로 이용하도록 혜택까지 주더라. 오목을 두고, 전략 이야기를 하다가 새벽이 되면 사우나에 가서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피시방으로 모였다."
권 협회장에게 오목은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아내도 오목을 둔다, (결혼 전) 오목으로 데이트를 하곤 했다"라고 수줍게 말했다. 현재 중학생, 초등학생인 그의 두 아들 또한 오목에 푹 빠져 있다. 첫째 아이는 최근 오목 기사가 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고 하고 둘째 아이 또한 최근 열린 국내 오목 대회에 출전했다. 권 협회장의 아내는 오목에 관련한 다양한 포스터와 캐릭터를 직접 디자인하여 만들기도 했다고. 그야말로, '오목가족'이다.
오목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권 협회장이지만, 고민은 많다. 특히 그의 최대 관심사는 오목협회의 안정화다. 2016년 협회장으로 선출돼 두 번째 연임하고 있는 그의 1차 목표는 2000년 비영리단체로 만들어진 오목협회를 사단법인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작은 협회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사단 법인이 되면 후원을 하더라도 후원금처리가 된다. 지금은 비영리 단체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오목 하나만으로는 운영이 힘들 것 같아서 한국기원 등의 바둑 관련 네트워크를 강화할 생각이다."
어려운 실정에도 불구하고 협회장배를 비롯해 다양한 오목 대회가 국내에서도 개최됐다. 상금은 100~200만 원 선이고 1~2월 사이에는 오목명인전, 5~6월 사이에는 협회장배 오목 대회가 해마다 이어졌다. 대회 룰은 국제룰인 소시로프 방식을 적용한다.
권준철 오목 협회장은 소시로프룰에 대해 "둘 다 사과를 먹고 싶은 상황에서 이를 반으로 쪼개 상대방에게 고르라고 한다면 최대한 공평하게 쪼개려고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소시로프 선수가 만들었다고 해서 이름이 소시로프룰이다"면서 "일종의 세계 대회용 룰로 오목은 흑이 선수를 잡고 두면 무조건 승리한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룰"이라고 부연했다.
공식적으로 나온 소시로프 룰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오목에서는 '인간계'와 '신계'가 나뉜다고 할 정도다. 렌주룰이 일반인들 간 오목 대결을 위한 것이라면 소시로프룰은 오목 전문가들의 대결을 위한 룰이다.
소시로프룰이란?
1. 임시 흑을 잡은 사람이 26주형 중 하나를 둬야 합니다.
2. 임시 백을 잡은 사람이 26주형을 보고 흑과 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스왑 1)
3. 스왑여부가 정해진 상황에서 임시 백을 잡은 사람은 4번 째 수를 두면서 동시에 5수를 4개까지 부를 수 있습니다.
4. 임시 흑을 잡은 사람이 1~4수와 5수 개수를 보고 흑을 잡을지 백을 잡을지 정할 수 있습니다.
5. 스왑여부가 이뤄진 이후부터 흑을 잡은 사람이 미리 선언한 5수 개수만큼 둬야 합니다. 이 때 5수는 서로 대칭이 되는 자리에는 둘 수 없습니다.
6. 백을 잡은 사람은 여러 5수 중에 하나를 선택한 후 6수를 둡니다.
7. 6수부터는 렌주룰로 대국이 진행됩니다.
- 출처 : 렌주 국제 연맹
20년째 오목을 연구하는 김홍순 기사
▲ 김홍순 한국 오목 국가대표 기사. ⓒ 이희훈
"내가 오목 국가 대표 자격으로 세계 오목 대회에 나간다고 말했더니 다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오목에 국가 대표가 어디 있냐면서... 외국에서도 오목을 두냐고 묻더라."(김홍순 기사)
김홍순 기사는 20년째 오목을 연구하고 있다. 학창 시절,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오목 일등이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오목의 '신계'를 알게 되었고 20전 20패를 경험하게 됐다. 그에게 당시 20패의 경험을 안겨준 사람은 바로 권준철 오목협회장이었다.
"내가 바둑돌 한 수를 두는 것에 대한 상대의 대비에 대한 예측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이 수읽기다. 국내 대회의 경우 개인당 30분의 수읽기 시간이 주어지는데 중국의 경우 개인당 3시간을 주는 대회가 있어, 6시간 동안 한 경기를 치렀던 경험도 있다. 경기가 끝나면 마치 마라톤을 뛴 것처럼 다리에 힘이 풀린다."
오목을 전문적으로 두는 기사들은 한 수 한 수 심혈을 기울인다. 상대가 두는 수에 대한 대비에 대비를 거듭하느라 그들의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하고 끊임없이 돌아간다. 김홍순 기사는 자신 있게 변칙 플레이를 즐겨 쓰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또 자신은 수읽기에 시간을 쏟기보다는 감각에 더 의존하는 직관형 플레이어라고 부연했다.
"오목은 나에게 있어 비타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트레스나 힘든 일이 있어도 오목을 두는 것만 생각해도 힘이 되더라. 여자 친구에게 차였을 때도 오목을 두면서 극복했다. 오목은 내 인생의 활력소다."
김홍순 기사는 배달 운송업 일을 하고 있다. 고된 일을 한 뒤에는 쉬고 싶은 마음이 클 것도 같은데, 오목을 둘 때면 피곤함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국내 오목계가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김홍순 기사는 내년 초에 열리는 대회인 '오목명인전'에 선뜻 100만 원을 기부했다. 그는 이번 2019 에스토니아 세계대회를 위해 사비를 털기도 했다. 그는 언젠가 오목계에도 기업 스폰서가 생기면, '오목 기사'를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자신의 오랜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94년생, 멘사 회원이자 오목계 유망주, 장원철
"오목은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닌 바둑돌도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목을 전문적으로 두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원철 기사)
오목에도 유망주가 있다. 장원철 기사는 '유망주'라는 단어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 1994년생으로 역대 오목 국가대표 선수로는 최연소인 그는 IQ148 이상의 천재들만 가입한다는 멘사(mensa) 회원이기도 하다. 그는 유치원 시절 어머니가 온라인으로 오목을 두는 것을 보고 오목 두기를 시작했다. 당시 등급이 어머니보다 더 높아 어머니도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 그렇게 실력을 키우다 보니 어느새 오목 국가 대표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등학교 때 내가 오목 대회를 열었다. 아침부터 수업이 끝날 때까지 쉬는 시간만 되면 다들 오목 이야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과 부모님이 '오목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한동안 오목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오목 대회를 만들어 오목을 연구하곤 했다. 멘사 대학생 모임 시그(Sig)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멘사 모임 내에서도 주기적으로 오목 모임을 열었다. 그에게서 오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그는 오목 기사로 입단한 이후 기력(실력)이 급상승했다. 앞서 오목 기사로 활동하는 선수들의 경기들을 꼼꼼히 챙겨보는 장원철 기사는 올해 출전하는 오목 국가 대표 선수 중 가장 미래가 기대되는 선수로 꼽힌다.
"하루에 약 열 시간 정도 연습 중이다. 오목 세계대회가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좋은 성적 거두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세계 대회에 도전하고 싶었고 목표는 당연 우승이다."(박웅배 기사)
최고의 한 수를 위해 끊임 없이 생각하는 박웅배
▲ 권준철 한국 오목 협회장과 김홍순 한국 오목 국가대표 기사의 오목 대국. ⓒ 이희훈
박웅배 기사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연습량이 엄청난 선수로 유명하다. 대구에 살고 있는 그는 2017년 오목 기사가 된 뒤 세계 대회 우승을 목표로 달려왔다. 그는 수읽기에 능하다. 바둑과 장기도 경험한 그는 오목에 푹 빠지면서 전문적으로 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오목을 안 둔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그는 최고의 한 수를 두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다양한 커뮤니티와 해외 오목 대국 사이트를 섭렵하고 있는 박웅배 기사는 한판에 최대 석 달까지 두는 오목도 있다고 설명했다.
"수읽기에는 대처하는 응수와 변화 수가 있다. 5수부터 수읽기를 하는 것보단 15수부터 수읽기를 하는데 그것이 제일 효율적이다. 5수부터 수읽기를 하려면 그 양이 상당히 방대하기 때문이다."
오목 기사들은 한결 같이 수읽기를 강조했다. 오목의 꽃은 수읽기다. 박웅배 기사는 오목 연구를 하는 것을 시험 준비로 비유했다. 그는 "단순히 시험에 대비하여 이를 준비할 때도 참고서만 본다고 하여 시험을 잘 보는 건 아니다"면서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전에 들어가면 머릿속에 안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끔씩 오목에 빠지게 된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했다. 취업을 빨리하지 못한 이유가 오목에 빠졌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 때문. 그는 "오랫동안 연구해 온 시간이 아깝기도 해 세계 대회에서 그동안 갈고 닦았던 실력을 발휘하는 상상을 한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목 국가대표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한 마디
▲ 권준철 한국 오목 협회장과 김홍순 한국 오목 국가대표 기사의 오목 대국. ⓒ 이희훈
오목으로 국가대표라는 타이틀까지 단 이들 세 사람에겐 공통의 고민이 있다. 바로 오목을 단순한 아이들 놀이라고만 생각하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 탓에 가족의 응원, 기업의 지원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이들의 열악한 상황은 이웃나라 중국의 상황과 비교해봤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바둑과 장기를 마인드 스포츠로 분류해 즐기는 중국의 경우 오목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중국 학교에선 오목이 인기 방과 후 수업 중 하나다. 또 상해 지역에만 10여개, 북경에는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오목 학원이 있다는 것이 오목협회장의 설명이다.
오목에 대한 국내 인식을 개선하고자 오목협회는 바둑계와 협력해 오목을 바둑의 서브과목으로 두고 수업을 진행하는 등의 새로운 구상을 하는 중이다. 오목 국가대표로 나선 세 명의 기사 또한 각자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소규모 대회를 이벤트로 개최하는 등 오목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스토니아를 시작으로 국가대표 오목 기사 세 명은 앞으로 어떤 역사들을 만들 수 있을까? 그들의 한걸음 한걸음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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