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두 개의 각성: 무녀와 야수 (二개의 覺醒: 巫女와 野獸)
무학산 정상 부근의 깎아지른 절벽, 검은 밤의 장막이 드리운 곳에서 싸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 위, 미나는 악귀로 변모한 이사장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희미하고 투명한 빛을 머금은 하얀 기운의 장군신 형상이 빛나고 있었고, 그 기운이 짙푸른 한복을 입은 미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에서는 영롱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나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산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한 맑은 울림이 있었다. 그 음성에 악귀의 얼굴을 한 이사장, 아니 악귀의 분신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찢어진 눈썹 사이로 이글거리는 붉은 안광을 번득이며 왼손을 뻗었다. 검은 아지랑이가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기절해 쓰러져 있는 민성에게 쏘아졌다. 마치 민성의 영혼마저 꿰뚫으려는 듯 맹렬하게 날아가는 검은 기운이었다.
검은 아지랑이가 민성의 몸에 닿을 듯한 찰나,
"챙!"
맑고 청아한 금속음이 밤의 산을 갈랐다. 민성의 바로 앞, 땅에 박혀 있던 미나의 검이 거대한 방패라도 된 듯 순식간에 검은 기운을 막아섰다. 검은 아지랑이는 검에 닿자마자 마치 모래가루처럼 산산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호연의 눈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박혀 있던 검은 민성의 몸을 보호하듯 빠르게 백옥색의 하얀 기운을 펼치고 있었다. 민성에게 전기 충격 봉을 휘두르려던 그림자들은 일제히 경악하며 한 발짝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행동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명확한 공포가 어렸다.
"소용없을 겁니다."
미나는 나지막이 이사장을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어린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태곳적 현자의 지혜와 무녀의 냉철함이 섞여 있었다.
"당신의 악의 기운으로 보아… 본체는 아닌 듯하군요. 자신이 이미 깊이 침식되어서… 그 악한 의지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이사장의 얼굴은 악귀의 미소를 띠고 격렬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포효했다. "어린년이 뭘 안다고 떠드느냐! 다 거래를 한 거다! 나는 대가를 지불하고, 이 능력을 얻었다!" 그의 음성에는 미나의 통찰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사장은 두 팔을 벌려 자신 주변의 검은 아지랑이를 더욱 짙게 모으더니, 마치 뱀처럼 날렵하게 꿈틀거리는 두 줄기의 검은 기운을 미나에게 뻗어냈다. 미나는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오는 검은 기운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저 눈을 감았다. 검은 두 줄기 아지랑이는 마치 민성과 호연에게 트라우마를 건드렸던 것과 같은 공격 방식을 취하며, 미나의 몸 주위를 감싸고 그녀의 머리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의 내면, 그녀의 영혼을 노리는 공격이었다.
미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젖힌 채 그 공격을 받아들이는 듯한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사장, 아니 악귀의 분신은 경악에 찬 듯 움찔하며, 다시 더욱 굵고 강력한 검은 아지랑이를 미나에게 뻗어왔다. 미나의 침착함은 그에게 이해 불가능한 현상이었다.
미나는 눈을 감은 채,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산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 선명했다.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당신의 능력. 상대의 영혼을 세뇌시키거나, 그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죠? 상대의 상처, 욕망, 자책… 그런 기억들을 이용하는 치졸한 술수. 하지만 저는… 이미 마음을 비운 자. 지나간 시간에 얽매이지 않게… 모두 비웠습니다."
미나는 산신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당돌한 미나의 말이 산신에게 흥미를 불어넣었을 때, 산신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제법 건방진 아가로구나. 감히 신(神)에게 거래를 논하다니. 그러나 그 배짱이 제법이로다. 좋다. 네가 '존재가 될' 그릇인지 내 시험해 주마. 그럼 내 첫 번째 가르침은 '비움'이다. 니 아~~~~~주 짧은 인생의 지나온 시간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느냐? 아니면 이미 지나가고 없는 것이냐?"
미나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일 뿐입니다."
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한데 너희 인간들은 참으로 어리석다. 이미 지나가고 없는 시간에 집착하며, 그 그림자에 얽매여 자신을 괴롭히고, 망치고, 때론 파멸까지 자초하지. 네가 진정으로 신의 힘을 감당할 그릇이 되려거든, '지나간 시간은 추억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순간의 너'를 흔들게 하지 않아야 한다. 내 너에게 처음 주는 과제는 바로 그 '비움'이다. 마음의 빈 공간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며, 가장 첫걸음이다."
산신의 가르침을 받은 후, 미나는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회상했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로 인한 아빠와의 깊어진 갈등. 비행 청소년처럼 방황했던 자신의 모습. 어린 동생과의 서투른 싸움들. 그 모든 기억들은 분명 자신을 괴롭히고 슬프게도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 아빠, 호연이와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들도 스쳐 지나갔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소중한 순간들.
미나는 깨달았다. 지나간 시간들은 그저 추억일 뿐. 그 추억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흔들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을. 고통스러운 기억은 내려놓고, 행복한 기억은 소중히 간직하되, 어떤 것도 자신을 얽매이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비우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첫 번째 수행이었다.
미나의 말에 이사장은 악귀처럼 뒤틀린 얼굴로 포효했다.
"웃기지 마라! 인간은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디딤돌로 밟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이든, 기쁨이든 모두 자신을 형성하는 근원이 되는 법!"
이사장은 자신의 영적인 술법이 미나에게 전혀 통하지 않자 극도로 당황한 듯했다. 그는 팔을 휘저으며 주변의 그림자들에게 다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이사장, 아니 악귀의 능력은 염력이나 직접적인 신체적 능력을 올려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다른 이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는 데 특화된 존재였다.
그림자들이 일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 부상을 입은 채였지만, 고통을 모르는 듯 쓰러져 있던 민성에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호연도 자신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미나의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오잉?"
호연은 누나의 모습에 너무 놀라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누나가… 웬 선녀 같은 모습이지?"
그의 눈에는 짙푸른 한복을 입고 있지만, 그 주위로 희뿌옇고 하얀 기운이 빛나는 미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 등 뒤로는 키가 크고 우람한 장군….
"아! 장군신!" 호연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미나와 그 뒤의 장군신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강림이라는 건가? 장군신이 직접…!"
그는 감탄과 경외심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였다. 요란한 발소리가 다시 귀를 때렸다.
그림자들이 이젠 자신과 미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차! 아빠!?"
호연은 급히 민성이 쓰러져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민성은 보이지 않았다. "어라? 어디 간 거지? 벌써 납치됐나? 대체… 뭐지?"
걱정할 생각조차 할 틈이 없었다. 그림자들이 눈앞까지 달려들었다.
"누나를 지켜야 하는데…!"
호연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까의 폭주로 인해 몸속의 기(氣) 운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인지, 제대로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한계를 저주했다.
"이거… 어쩌지…?"
그때였다. 어디선가 '크르릉!' 하는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들을 막아서는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민성 형사였다! 호연의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어? 아빠는 아까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기절했는데?' 혼란스러운 의문이 호연의 머릿속을 휘젓는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아득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저놈… 꼭 야수 같구나. 짐승의 피가 너희 집안에 짐승의 냄새가 흐른다 했더만… 저놈에게 몰린 것인지? 발현된 것인지?… 악재일지도 모르겠구나…."
장군신의 목소리였다. 미나와 호연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놀라움과 혼란이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그들은 다시 민성을 바라보았다.
민성은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마치 무도인이 '자연체 자세'를 취한 것처럼 보였다. 달려오던 그림자들은 민성의 이상한 기운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민성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싸움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무술의 기본조차 없는, 오직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야생의 짐승처럼.
민성은 지면에 발을 딛는 대신, 낮은 포복 자세로 전장을 쓸어 가듯 움직였다. 짐승의 육감으로 다음 공격을 예측하며, 그의 몸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냈다. 달려드는 그림자 하나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는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옆 그림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묵직한 '퍽!'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턱뼈가 부서지는 것이 분명했다. 피가 튀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흐르는 피를 핥듯 섬뜩한 푸른 안광을 번득였다. 다른 그림자 한 명이 민성의 등 뒤로 파고들었지만, 민성은 그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옆에 부러진 가지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나무에 그대로 '콰직!' 하고 쑤셔 박아 걸어 놓았다.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나뭇가지에 걸어두듯, 그의 행동은 잔인하고 효율적이었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또 다른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지만, 민성은 몸을 웅크려 그를 향해 도약했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그의 척추에 발을 꽂아 넣었다. '우득!'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림자는 고꾸라졌고, 민성은 그의 위에 올라타 광적으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 그림자는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민성의 잔인하고 인간을 넘어선 움직임. 피와 살점을 갈망하는 듯한 그 야수적인 본능. 그의 눈은 오직 생존과 파괴만을 담고 있었다. 기절해 있던 그의 신체는 상처 하나 없이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성이 지워진 듯한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미나는 눈을 크게 뜨며 경악했다. '아빠… 아빠가… 정말 아빠가 맞아…?' 어린 시절 보았던 자애롭고 정의로운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피 맛을 탐하는 짐승의 그것이었다. 옆의 호연도 낯선 아빠의 모습에 몸을 부르르 떨며 점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의 작은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미나야. 빨리 끝내야지, 저 놈이 산다. 안 그러면… 짐승으로 남게 된단다."
장군신은 말을 마치고는 미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동시에 미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듯한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는 양손을 펼쳐서 은빛이 영롱하게 빛나는 무기들을 공중에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실체가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영적인 기운으로만 만들어진 무기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날카로운 창, 거대한 언월도, 세 갈래의 삼지창, 섬세한 수리검, 그리고 방패까지. 밤하늘에 떠 있는 은하수처럼 영롱하게 반짝였다. 각각의 무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기운이 전장의 혼탁함을 잠시나마 정화하는 듯했다.
미나는 황당하다는 듯 장군신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화가 난 듯 붉어져 있었다.
"장군님! 이렇게 무기가 많으면서… 왜 진작 안 도와줬어요?"
어린 소녀의 투정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만큼은 전장의 긴장감마저 잊은 듯했다.
장군신은 화난 미나를 보며 잔잔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가, 직접적인 육신에게는 그저 허깨비와 같으니 안 통하는 법. 그러나 그 육신 안의 '혼'과 '영적인 힘'에게는… 행사(行使)가 가능하지. 그리고… 네가 과연 그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지. 자… 골라 보거라."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속에는 심오한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미나는 떠 있는 무기들 사이에서 한참을 고르더니, 마침내 길고 곧게 뻗은 하얀빛의 창을 손에 쥐었다. 창은 그녀의 손에 닿자마자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그녀는 뒤를 돌아 악귀의 모습을 한 이사장을 바라보았다. 이사장은 여전히 기절해 있는 민성에게 악귀의 힘을 쓰려는 듯, 검은 아지랑이를 양손에 모아 뿜어내고 있었다.
미나와 이사장 사이에는 여전히 민성이 짐승 같은 본능으로 그림자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림자들과 민성의 격렬한 싸움 한복판을 지나, 정확하게 이사장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 그 상황 속에서 미나는 초조하게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망설임이 그녀의 어린 어깨를 짓눌렀다.
그때, 장군신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울렸다.
"욘석아! 이 할애비를 써먹어야지!"
"도와주세요! 힝…!"
장군신이 창을 던지는 모습처럼 오른손과 발을 길게 뒤로 뺐다. 마치 태권도의 품새처럼 완벽한 자세였다. 미나도 마치 거대한 영적인 존재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똑같이 움직였다. 그녀의 몸속에서 끌어올린 모든 신성한 기운을 모아, 주저함 없이 단숨에 악귀 이사장에게 창을 던졌다. '쉬이 이익~' 날카로운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은빛 섬광이 밤의 어둠을 가르고 날아갔다.
은빛으로 빛나는 창이 민성과 그림자들의 격렬한 싸움 한복판을 꿰뚫고 빠르게 날아갔다. 검은 아지랑이를 피워내던 이사장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고 지나갔다. 외상은 없었다. 단 하나의 핏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아지랑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내 악귀는 비명 같은 괴성과 함께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그는 그대로 쓰러져 밤의 산자락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의 몸을 감싸던 검은 아지랑이는 흐릿해졌다가 다시 짙어졌다를 반복했다. 그의 경련하는 몸뚱이가 마지막 생명을 그러모으는 듯했다.
'이게… 끝인가?'
이사장은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찢겨 나간 그의 이성 속에서 파편처럼 과거의 기억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젊은 날, 정재혁과 의기투합하여 작은 회사를 세웠고, 열정과 패기로 무서운 속도로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손에 잡힐 듯한 성공과 부를 목전에 두었다. 그러나 탐욕스러운 대기업의 방해 공작과 야비한 수법 앞에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회사는 부도가 났고, 그는 빚더미에 앉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에게는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함께 고생하며 지내온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고통 속에서 홀로 고뇌하며, 남겨질 가족들을 차마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결국, 모든 의미를 잃고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죽음을 택하려 했던 어느 날, 그는 차가운 비가 내리는 일본의 깊은 산 골짜기, 인적이 끊긴 절벽 아래에서 태초의 어둠, 악신(惡神)을 만났다. '스사노오노미코토 신을 만난 순간부터…' 그는 악신에게 절대적인 힘을 얻는 대가로 자신의 영혼과 인간성을 팔아넘겼다. 그가 바라던 것은 오직 세상의 모든 불안과 공허를 지배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과, 다시는 누구에게도 무너지지 않을 '영광'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그를 집어삼켰고, 자신의 손으로 무고한 이들을 지배하며 여기까지 온 삶에 대한 깊은 회한과 죄책감이 몰려왔다. '차라리…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을 했었어야 했던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아가, 악귀의 조롱 속에서 비참하게 울부짖었다. 그 모든 후회와 고통이 뒤엉켜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했다.
쓰러진 이사장의 몸에서 악귀의 기운이 한데 뭉치듯, 검은 아지랑이들이 다시금 모이기 시작했다. 이사장을 조정하며 감시하던 악귀의 실체, 그 존재의 일부가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모든 기운이 다 모였는지, 아지랑이가 아닌, 말 그대로 **'흑(黑) 무결점의 검은색 구체'**가 밤하늘에 떠올랐다. 마치 칠흑 같은 어둠을 깎아 만든 듯, 어떤 빛도 흡수해 버리는 완전한 검은색 구체였다. 그리고 그 구체의 한가운데가 세로로 길게 갈라지더니, 미나의 환영 속에서 보았던 붉은 눈이 나타났다. 그 눈은 끔뻑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휘이잉!'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악귀는 이사장의 몸에서 벗어나 달아난 것이었다. 그 검은 구체가 사라진 자리는 섬뜩한 공허함만을 남겼다.
미나는 자신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장군신을 뒤돌아보며, '잘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장군신은 그녀의 기특함에 미소로 답했다.
호연도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 상식을 벗어난 일들에 놀라서 굳어있었다. 그의 입은 벌어져 있었고, 눈은 휘둥그레진 채 밤의 기이한 현상들을 좇고 있었다. '아차! 아빠!' 그제야 그는 민성의 행방을 찾았다.
고요함이 다시 숲을 지배했다. 핏물 냄새와 찢겨나간 숲의 잔해들만이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민성은 이미 전투를 끝낸 듯했다. 그의 주변에는 그림자들 전부가 민성의 손에 의해 살해당해 있었다. 찢어진 전투복과 꺾인 사지, 그리고 기괴하게 부서진 몸의 형태를 한 열댓 명의 그림자들의 사체들이 차가운 밤의 숲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맹수가 폭풍처럼 휩쓸고 간 자리처럼 처참한 광경이었다.
민성은 마치 방금 전의 싸움에서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푸른 안광은 이제 서서히 꺼져가는 숯불처럼 희미해졌고, 핏기 어린 그의 얼굴에는 깊은 허탈함과 함께 싸움의 잔상이 드리워져 있었다. 옷은 찢겨지고 여기저기 피 묻은 자국이 선명했지만, 상처는 기이하게도 아물어가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숲의 어둠 깊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아직도 사냥감을 찾고 있는 맹수처럼. 그의 몸에서는 인간의 체취가 아닌, 거친 짐승의 냄새가 짙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미나와 호연은 그런 민성의 모습에 경악과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일들, 그리고 아빠의 섬뜩한 변모. 그들의 아빠는 이제 자신들이 알던 그 존재가 아니었다. 호연은 쓰러진 이사장과 사라진 악귀, 그리고 아빠의 무시무시한 힘 앞에 말없이 굳어있었다. 민성, 미나, 호연 가족의 무학산에서의 첫 접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깊어가는 밤,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처절한 싸움의 여파를 감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