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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고리2 05화

제1부. 태초의 기록: 다시 얽힌 운명(4)

4. 잠입: 어둠의 굴레를 밟다

by 끄적쟁이

4. 잠입: 어둠의 굴레를 밟다


밤의 장막이 깊게 드리워진 **왜(倭)**군 숙영지 근처. 차가운 겨울바람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멀고 희미한 군영의 소리는 마치 겨울잠에서 깨어난 맹수의 으르렁거림처럼 들렸다. 아랑과 포수 이동진은 키 큰 소나무와 거친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숙영지로 천천히 다가가고 있었다. 이동진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지만, 핏기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아랑은 낯선 환경 속에서도 특유의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숙영지 바깥으로는 두 명씩 짝을 지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왜군 병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허술했다. 보초들은 일정한 지정된 장소에 배치되어 있기보다는, 그저 제멋대로 움직이며 순찰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아예 불침번 자리를 벗어나거나, 심지어 나뭇가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병사도 있었다. 이따금 "으음…" 하는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오기도 했다. 그들의 어깨에 짊어진 길고 투박한 화승총(火繩銃)은 마치 장난감 총처럼 위압감을 주지 못했다. 아직 조선 깊숙이 들어온 초입이고, 주위에 적군이 보이지 않는 곳이기에 경계가 허술해 보였다. 그러나 이 허술함은 초영과 아랑, 그리고 동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침투 기회가 되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안이함 속에 숨겨진 흉계를 직감했다.


이동진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초들의 틈새를 노렸다. 그의 시선은 숲 속의 맹수처럼 예리했고, 몸은 마치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왜 말에 능통한 그의 담대함이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동진이 먼저 기척 없이 몸을 낮춰 숲의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솜털처럼 가벼웠고, 풀잎 하나 밟히는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랑은 잠시 멈칫했다. 이런 식의 인간적인 잠입은 그녀에게 익숙지 않은 방식이었다. 구미호의 능력을 쓰지 않고 오직 인간적인 감각과 기지(機智)에만 의존하는 침투라니, 그녀의 본능이 위험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초영 도사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동진의 뒤를 따라 숲 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녀의 움직임 또한 나뭇가지 하나 흔들리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그녀의 옅은 비단옷자락은 바람에도 나부끼지 않았다.


[장면 전환: 숙영지 속 아찔한 조우]


어둠이 짙은 숙영지 안으로 들어서자, 축축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텐트와 막사들이 어수선하게 늘어서 있었고, 드문드문 피어오르는 모닥불에서 나는 희미한 연기 냄새가 매캐하게 공기를 채웠다. 동진은 잔뜩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허둥대는 그의 모습은 완벽한 신참 왜군 병사 같았다. 초영이 만들어준 얼굴은 완벽했지만, 숙영지의 복잡한 지리는 그에게 익숙지 않은 미로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바로 그때였다. 한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왜군 병사 하나가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향해 불쑥 말을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잔뜩 불만과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おい!てめえ、どこに行ってたんだ?交代、まだなのか?ずいぶん気楽なご身分だな!」 ("어이! 너, 어디 다녀온 거야? 교대, 아직이야? 꽤나 태평하네, 너!")


동진은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초영 도사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혈자리(血자리)를 눌러 납치해 온 왜놈 병사와 비슷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침착하게, 조금은 어수룩하게, 그리고 전날 술이라도 마신 듯 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졸음에 겨운 듯한 쉰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ああ、そうだったか。どこに行けばいいんだ?すまない、少し道に迷ったようだ…」 ("아하, 그랬구나.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미안, 길을 좀 헤맨 것 같아서…")


동진의 어설픈 대답에 왜군 병사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てめえ、馬鹿か?まさか酔っ払ってたんじゃねえだろうな?昨日あれだけ酒盛りしたのに、もう飲んでたのか?あっちの坊主どもがいるところだ。とっとと行け!」 ("너 멍청한 거냐? 설마 아직도 술에 취한 건 아니겠지? 어제 그렇게 술 마시고 또 마셨냐? 저쪽 승려들 모여 있는 장소야. 어서 가!")


그 병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진에게 빨리 가보라며 발로 그의 엉덩이를 툭 차기까지 했다. 꽤나 힘이 실린 발길질이었다. 동진은 '이곳에 웬 승려?'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병사가 가리키는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머쓱해하는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그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어설픈 병사 연기를 유지했다. 그때, 동진에게 말을 걸었던 왜군 병사가 그제야 동진의 뒤에 서 있는 아랑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의 눈은 의심의 빛을 담고 있었다.


「ところで、こいつは誰だ?お前とは見たことがないようなんだが?まさか、この前言い寄ってた朝鮮の女とかじゃねえだろうな?」 ("근데, 이 녀석은 누구더라? 너랑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더니 불청객을 탐색하듯 아랑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왔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퀴퀴한 왜군 특유의 냄새와 노골적인 시선에 아랑은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역겨움을 느꼈다. 몸에 돋아나는 소름을 애써 억누르며 뒤로 두어 발자국 거리를 두었다. 본능적으로 검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지만, 인간의 모습인 이상 자제해야 했다. 그녀는 질색하는 표정을 애써 감추려 했지만,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까지는 통제하기 어려웠다. 위기의 순간, 동진이 다시 한번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재빨리 아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불평하듯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가득했지만, 오히려 그 불쾌함이 왜군 병사를 속이는 데 일조했다.


「やめろ、馬鹿!こいつ、お前が前酒飲んで騒いだせいで、あちこち迷惑かけてて、避けてたから見なかっただけじゃないか!俺にまで迷惑かけやがって!」 ("야, 임마, 바보야! 이 자식, 네가 지난번에 술 먹고 소란 피워서 이리저리 폐를 끼치니까, 그 일을 피해 다니느라 못 본 거 아니냐! 나한테까지 폐를 끼치네!")


동진의 말에 왜군 병사는 머쓱해하며 아랑을 향해 투덜거렸다.


「そうか?まあ、ごめん。だが、お前、顔色はよくないな。あまり無理するなよ。じゃあな!」 ("그런가? 뭐, 미안. 근데 너, 얼굴색이 좋지 않네. 너무 무리하지 마. 그럼 난 간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불쾌했던 기억을 상기시킨 것에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갈 길을 갔다. 거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아랑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군 병사의 거친 손길이 닿았던 어깨가 얼어붙는 듯했다. 너무나도 완벽한 동진의 기지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진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위기를 넘겼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리고는 아까 말을 걸어온 병사가 알려준 승려들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달빛 아래,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들은 고요한 밤의 숲 속을 걷는 두 개의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장면 전환: 승려들의 기이한 의식]


승려들이 있는 막사 주위로는 비교적 삼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기가 감도는 밤공기 속, 보초병들은 두 명씩 짝을 이뤄 굳건히 서 있었다. 이전의 허술한 경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막사를 중심으로 삼중의 경계망이 쳐져 있었고, 주기적으로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재빠르게 동진과 아랑도 교대하고 있는 보초병들 틈 속으로 들어가 눈치껏 그들과 함께 했다. 완벽하게 위장된 그들의 모습은 아무런 의심도 사지 않았다. 동진은 슬쩍 힐끗거리면서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승려들을 쳐다보았다. 아랑 또한 시선을 그곳에 고정했다. 그녀의 노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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