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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고리2 04화

제1부. 태초의 기록: 다시 얽힌 운명(3)

3. 추적의 밤: 왜(倭)의 그림자를 밟다

by 끄적쟁이

3. 추적의 밤: 왜(倭)의 그림자를 밟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초영의 초가집 마루에는 차가운 새벽 공기가 칼날처럼 스며들었다. 화로의 붉은 기운이 사그라진 지 오래, 방 안에는 곤히 잠든 10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초영과 아랑은 웅크린 채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 얼굴을 감싼 눈물자국과 핏기 없는 입술은 비극적인 어젯밤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름조차 아직 물어보지 못한 어린 생명. 깨어난다면 또다시 어미 아비를 찾으며 울음을 터뜨릴 것이 자명했다. 그 모습을 두고 떠나려니, 차가운 도사(道士)의 심장에도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떠나야 하는 자와 남겨져야 하는 자의 운명 앞에서, 초영은 한숨을 삼켰다.


아랑은 표현은 못 했지만, 그 검붉은 눈동자에는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백 년을 조금 넘게 살아온 구미호인 아랑은, 인간 아이의 순수한 슬픔 앞에서 자신의 강인함이 무색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까르르 웃던 천진한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를 향한 그 미묘한 감정이 아랑에게는 낯설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인간적인 정(情)이라는 것이 이리도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인지, 그녀는 고요히 심장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누렁이는 그들의 인기척에 이미 잠이 깨어 있었다.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초영과 아랑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눈빛은, 마치 그들의 목적을 이해하고 잠시 헤어져야 할 것을 예감하는 듯했다. 듬직한 충견답게,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의 곁을 지켰다. 가끔씩 아이의 고른 숨소리에 맞춰 얕게 숨을 쉬는 누렁이의 모습은 거대한 수호신 같았다.


초영은 그런 누렁이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녀석이 자신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미소였다. 그는 손짓으로 누렁이를 가까이 불렀다. 누렁이는 커다란 머리를 초영의 무릎에 가져다 댔고, 초영은 그 북 실한 털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누렁아, 잠시 다녀오마. 아이가 깨어나면 부엌으로 안내하여 따뜻한 밥을 챙겨 먹도록 하고, 이 초가집 멀리 돌아다니지 않도록 그림자처럼 지켜주어야 한다. 네게 의지하는 바가 크니, 내 심부름을 기특하게 여겨 주려무나. 혹시라도 좋지 않은 기척이 느껴지면 멀리 가지 말고, 나와 아랑이 돌아올 때까지 아이를 지켜라."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더불어 누렁이를 향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아랑도 초영의 곁에 쪼그려 앉아 누렁이의 귀를 살짝 간질였다.


"잘 부탁해, 누렁아. 절대 위험한 일은 없게 해줘야 해, 응? 힝… 내 꼭 돌아올 테니 아이를 부탁한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협박과 애원이 섞여 있었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누렁이는 마치 알겠다는 듯 '컹' 하고 짧게 짖으며 초영의 무릎에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는 다시 아이 곁으로 다가가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 모습은 말 없는 맹세처럼 굳건했다.


차디찬 새벽의 산 공기를 맞이하며 둘은 마침내 길을 떠났다. 초영의 흰 도포 자락이 겨울바람에 나부꼈다. 밤이 품은 짙은 푸른색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점멸하는 그림자처럼 산길을 따라 사라져 갔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새벽달만이 그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배웅했다.


[장면 전환: 악귀의 흔적을 쫓다]


어제의 핏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학살의 현장으로 다시 찾아간 초영과 아랑. 흰 눈밭 위에는 참혹한 죽음의 흔적만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초영은 악귀와 잠시 사투를 벌였던 그 장소에서 악귀의 기운을 찾아보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흑백 시야는 영혼의 잔상을 쫓았지만, 악귀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진 듯했다. 오직 망자의 혼들이 찢겨 나갔던 그 희미한 비명 소리만이 텅 빈 허공을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눈으로 보이는 흔적을 좇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악귀의 물질적 육체가 아닌 아지랑이 같은 존재였던 터라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악귀의 잔혹함에 비해 그 흔적의 허무함은 더욱 기이한 기운을 풍겼다. 모든 것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이 녀석… 정말 깔끔하군. 보통의 요괴라면 이리 흔적도 없이 사라질 리 없을 터." 초영은 혀를 찼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의문이 드리워졌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악귀가 나타나기 직전과 직후에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왜(倭)**군, 그들의 행방을 쫓는 것. 악귀의 등장과 왜군의 행태가 긴밀하게 엮여 있을 것이라는 초영의 직감은 더욱 강해졌다.


초영은 옆에서 따라오던 아랑을 보고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장난기 섞인 얼굴로 아랑에게 말을 건넸다.


"아랑아, 너 그 냄새 좀 맡아보거라."


"응? 무슨 냄새 말이야?"


아랑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냐는 듯 초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검붉은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너 여우 아니냐? 그럼 이 왜놈들의 냄새를 좀 쫓아 보라는 뜻이다. 아무리 바람에 쓸려도 그 수많은 병사들의 땀과 철(鐵)의 냄새는 남아 있을 터."


"뭐라고?!" 아랑이 자신을 짐승 취급하는 능글맞은 초영의 말에 발끈하며 대꾸했다.


그녀는 초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흥! 내가 어떤 여우인데 그런 천한 일이나 한단 말이야! 구미호의 자존심을 어디다 두란 말이야!"


초영은 그런 아랑을 보며 허허 웃었다. 그리곤 손을 내저으며 진정시켰다.


"워~ 워~ 진정하고, 내 말인즉, 나 또한 저 왜놈들이 지나간 흔적을 쫓으며 따라갈 수는 있다. 허나, 그 수많은 발자국과 어지러운 냄새 속에서 오직 왜놈들의 정확한 방향을 잡는 데는 너의 천부적인 후각이 더 빠르고 정확할 듯해서 하는 말이다."


사실, 초영의 말은 절반의 진심과 절반의 거짓이었다. 그 많은 군사들이 지나간 길에 흔적이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도 충분히 쫓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초영은 구미호 또한 요괴라는 것을 떠올렸다. 비록 아랑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한 요괴의 일종이었지만, 악귀 또한 영적인 존재이자 요괴의 '결(結)'을 같이하는 존재였다. 같은 결을 가진 존재만이 악귀가 남긴 미세한 흔적, 어쩌면 초영의 흑백 시야로도 잡아내기 힘든 ‘무형의 냄새’를 맡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직감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혹여 왜군 부대가 길을 나누어 갈라지기라도 한다면, 초영의 육안만으로는 정확한 진행 방향을 잡기 어렵다는 것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초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번 싸움은 단순히 요괴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력의 움직임과 싸워야 한다는 직감이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장면 전환: 축지법으로 길을 달리다]


"흥! 못 미더운 인간 같으니라고."


투덜거리던 아랑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콧구멍을 씰룩였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그녀의 후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사방의 미세한 공기의 흐름과 바람의 잔향, 그리고 땅속에 스며든 온갖 냄새의 층위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옅은 흙냄새, 시들고 꺾인 풀의 비린 향, 그리고 무엇보다 쇠와 땀과 가죽이 뒤섞인 왜군 특유의 지독한 냄새가 한 방향으로 선명하게 뻗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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