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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고리2 03화

제1부. 태초의 기록: 다시 얽힌 운명

2. 영혼을 탐하는 의문의 정체

by 끄적쟁이

2. 영혼을 탐하는 의문의 정체


차가운 눈발이 드문드문 흩날리는 조선의 한겨울 마을은 한 폭의 처참한 수묵화 같았다. 초영 도사의 흑백 시야 속, 모든 색은 의미를 잃고 오직 영혼의 기운과 움직임만이 선명했다. 찢겨나간 옷가지들, 깨어진 살림 도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온기를 잃은 시신들이 흰 눈밭 위에 검은 점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은 실낱같은 아지랑이처럼 육신을 벗어나 허공을 떠돌았다. 어떤 이는 자신의 찢긴 몸을 멍하니 바라보며 주저앉았고, 어떤 이는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생전의 습관처럼 문설주를 찾아 서성이었다.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의 애처로운 잔상들이 초영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들의 슬픔은 형체를 넘어선 비탄이 되어 초영의 심장을 아프게 짓눌렀다.


그 혼란스러운 영혼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검은 아지랑이 구체. 그 가운데에는 핏빛처럼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지랑이의 검은 막 사이로 드문드문 작은 붉은 점들이 박혀 있었고, 그 밑으로는 끔찍할 정도로 길고 얇은 네 개의 다리가 뒤틀린 채 꿈틀거렸다. 마치 거미의 다리 같았다. 그 다리들은 시체 위를 지날 때마다 마치 흙을 밟는 듯 묵직한 기운으로 영혼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영혼들은 악귀에게 닿을 때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흐물거리며 악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그림자 속의 존재. 초영은 갓 쓴 고개를 천천히 돌려 옆에 선 아랑을 응시했다. 그의 노란 눈동자도 흑백 시야 속에서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랑은 영혼들의 비참한 모습을 초영의 도술을 통해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었다.


"어찌… 저런 희괴한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초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믿기지 않는 듯한 떨림과 깊은 경악이 배어 있었다.


"망자를… 지금 먹고 있는 것이 맞는가…?"


100년을 조금 넘게 살아온 아랑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그녀의 목소리가 가까스로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돼… 저러면… 환생조차 못 하는 거 아니야?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한 것도 억울할 텐데…." 그녀의 아름다운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글썽거렸다. 죽은 자들에게도 최소한의 도리가 있었건만, 저것은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순수한 악이었다.


검은 악귀는 시체들 사이를 오가며 영가들을 끈질기게 흡수하고 있었다. 그 잔혹한 '식사'를 계속하던 악귀의 붉은 눈이 문득 한 곳에 꽂혔다. 바로 죽은 아비와 어미를 찾아 헤매던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작은 얼굴로 시체들 사이에서 자신의 부모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악귀의 굼뜨던 몸놀림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빠르게 아이를 향해 돌진했다. 끈적한 검은 아지랑이 덩어리 위로 불룩하게 솟은 부분이 섬뜩한 활 모양을 그렸다. 악귀에게 입이 있을 리 만무했건만, 초영과 아랑의 눈에는 마치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먹잇감을 향한 노골적인 기쁨과 탐욕이 담겨 있었다.


"어머! 부채 아저씨! 저 아가!"


아랑은 초영의 도포 자락을 붙잡고 다가오는 악귀와 위험에 처한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포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초영은 아랑의 외침에 대답하는 대신,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푸른 도포 자락이 겨울 칼바람을 가르며 날카로운 포물선을 그렸다. 일순간 사라졌던 그의 모습은 다음 순간, 악귀의 검은 구체와 아이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했다. 축지법으로 아이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악귀의 무자비한 공격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방패가 된 그의 등은, 작은 소녀에게는 거대한 바위산처럼 든든해 보였다. 악귀 앞을 막아선 초영의 등에 의아한 듯 기대선 어린 소녀의 눈동자는 공포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이내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초영의 뒤통수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무엇을 하는 녀석이기에, 이리 희괴 망측한 짓을 하는 것이냐?"


초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악귀는 자신을 가로막는 초영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붉은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았다. 인간의 형상조차 갖추지 않은 존재가 이리도 당당히 자신을 가로막는 상황이 이들에게는 처음이었으리라. 이내 악귀의 아지랑이 구체가 미세하게 부르르 떨리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 초영의 머릿속에 울렸다.


「汝は何者ぞ…我が行く手を…阻むか…?」 (너는 무언데… 나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악귀의 목소리는 음산한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혹은 수많은 이의 절규가 한데 섞인 듯 기괴했다. 더듬거리며 간신히 일본어를 내뱉는 악귀의 음성에는 놀라움과 불쾌함, 그리고 알 수 없는 고대의 권능이 실려 있었다.

초영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왜(倭) 나라 언어'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내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능청스레 말했다.


"뭐라 하는 것이냐…? 조선말을 할 것이지. 네가 하는 지금 짓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태도는 악귀마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악귀는 초영의 말을 못 알아듣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귀찮게 구는 인간의 도사가 자신에게 감히 질문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듯했다. 악귀의 검은 구체가 일그러지듯 진동하더니, 긴 다리 하나를 번개처럼 휘둘러 초영의 옆구리를 강하게 밀쳐내려 했다. 그 동작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조절도 없었다. 마치 성가신 벌레를 쫓아내듯 무자비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초영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그는 거미 다리가 뻗어 나오기 전에 이미 자신의 몸을 물처럼 유려하게 흘려 옆으로 피했다. 그의 발은 눈 위에 잔영만을 남기고 흔적 없이 미끄러졌다. 그 순간, 아랑이 전력으로 달려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가, 괜찮으냐?"


그리고는 자신의 등 뒤로 아이를 보호하듯 숨겼다. 그녀의 눈은 초영과 악귀를 번갈아 응시하며, 언제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초영은 아랑이 아이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물러나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소매 안에서 자신의 부채를 꺼내 들었다. 길고 흰 부채, 그 위에 그려진 봉황 한 마리가 비장하게 날개를 펼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악귀를 향해 고정되었다.


초영은 부채를 활짝 펴서 악귀를 향해 부채질을 했다. '파앗!' 부채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러나 악귀는 그 거대한 바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단단한 암석처럼 굳건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오직 악귀를 제외한 모든 사물이 뒤로 거세게 날아갔다. 시체들이 눈밭 위에서 몇 번씩 구르고, 찢긴 천 조각들이 겨울 하늘로 솟구쳤다. 멀리 초가집들의 기와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초영의 부채는 강력했으나, 악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악귀는 초영의 부채질에 잠시 주춤한 듯했으나, 이내 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단순히 밀쳐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네 개의 다리가 일제히 초영을 향해 뻗어 내렸다. 마치 거대한 창이 땅을 꿰뚫듯 묵직한 기운을 뿜어냈다. '콰아아 앙!' 얼어붙은 대지가 악귀의 발짓 한 번에 울렸다. 초영은 몸을 옆으로 번개처럼 돌려 간발의 차이로 그 공격을 피했다. 그가 피한 자리에 다리가 꽂히자, 얼어붙은 땅이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겨울바람 속에 음산하게 퍼졌다. '이놈, 무력으로는 통하지 않는 존재로구나.' 초영은 직감했다. 부채를 휘두르는 것으로는 이 존재를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닫고, 빠르게 부채를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의 표정은 순간 비장함으로 물들었다.


이후 초영은 양손을 펼쳐 허공을 향해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푸른빛 기운이 희미하게 감돌았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기류가 악귀의 몸을 감쌌다. 염력(念力)은 염동력(念動力)과는 달랐다. 염동력이 특정 물질이나 대상을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물리적인 힘이라면, 염력은 대상의 존재 자체에 간섭하고 그 형태나 흐름, 심지어는 본질까지도 비틀어버리는 정신적인 힘이었다. 그 힘은 대상의 심연에 닿아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초영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자, 악귀의 네 다리가 마치 투명한 실에 꿰맨 듯 사방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형상이 되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는 악귀는 흡사 거대한 허수아비처럼 허공에 붕 떠올랐다. 이내 다리들이 끊어지기 직전의, 처절하게 뒤틀린 거미의 모습처럼 변해갔다.


악귀는 당황한 듯 아지랑이의 검은 구체가 부들부들 격렬하게 떨기 시작했고, 붉은 눈동자는 혼란과 경악으로 이글거렸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악귀의 붉은 눈은 혼란으로 흔들렸다. 악귀는 입도 없었건만, 다시 한번 초영의 머릿속에 음산한 음성을 울렸다.


「汝は何者だ…なぜ我を阻む?我らの道を遮る者は死あるのみ。貴様を必ず見つけ出す…!」(너는 무언데… 왜 나를 방해하는 것이냐. 우리의 길을 막는 것은 곧 죽음. 내가 너를 꼭 찾아내고 말겠다!)


초영은 악귀가 무엇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는 무언데 나의 앞길을 막느냐'라고 묻고, 이내 '나를 꼭 찾아내어 복수하겠다'는 위협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비릿한 코웃음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초영은 염력을 거두는 대신 그 힘을 더욱 응축시켰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은 악귀의 뒤틀린 다리들을 마치 비단 실처럼 가차 없이 잡아 찢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다리들이 '피익-!'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갈가리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악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존재 자체가 산산조각 나면서 검은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흩어져 소멸해 가기 시작했다. 잔혹하면서도 압도적인 퇴치였다.


검은 아지랑이가 완전히 걷히자, 그 자리에는 오로지 흑색으로 된 작은 구체 하나가 허공에 떠 있었다. 붉은 눈동자 하나가 그 안에 섬뜩하게 박혀 빛나고 있었다. 덩치와는 상반되는 사람 머리만 한 크기의, 초영의 주먹 안에 들어올 만한 작은 크기였다. '허허, 이것이 이놈의 본체인 것인가?' 초영은 흠칫 놀랐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넘어선 존재의 형태였다. 염력으로 그 악귀의 본체 같은 것을 움켜쥐려 하는 찰나, 그 악귀의 작은 구체는 마치 허공을 찢고 이동하듯,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처럼,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초영은 허망하게 허공에 뻗었던 손을 내렸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의문이 드리워졌다. '허허… 이거, 저놈이 본체인 것인가? 아니면 진짜 본체는 다른 곳에 있고, 자신의 분신 같은 것을 심어 두고 조종했던 것인가…? 정체가 대체 무엇이지…?' 그의 도사로서의 오랜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존재는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 싸움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예감이 섬뜩하게 스쳐 지나갔다.


악귀가 찢겨 소멸한 자리에서는 죽은 망자들의 영혼들이 마치 샘물이 솟아나듯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검은 구체 속에 갇혀 있던 영혼들이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들은 당황한 모습을 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이내 자신들을 구원한 초영에게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초영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그들 앞에 투명한 '염력의 장막'을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유리벽이 허공에 세워진 듯, 영혼들은 더 이상 초영에게 다가올 수 없었다. 그는 그들에게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자네들에게 해줄 것도 할 것도 없네. 이미 자네들은 죽은 사람들이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세상은 엄연히 다르니… 어찌 산 자가 죽은 자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있겠는가. 슬프고 억울한 마음이야 헤아릴 길이 없으나, 이미 결정된 순리를 어찌 인위로 거스르랴. 잠시 기다리면 곧 저승처사님들이 와서 데려갈 것이니, 이리 동요하지 말고 잠시만 기다리시게들…."


초영의 목소리에는 연민이 스쳤지만, 도인으로서의 준엄한 지침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죽은 자의 영역에 산 자가 감히 개입하는 것은 또 다른 혼란을 낳을 뿐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도(道)는 생명의 순환과 질서, 조화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의 참혹한 죽음은 분노를 불러왔지만, 죽음을 넘어선 영혼의 영역은 도사라고 해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하늘의 뜻이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아랑은 품에 안은 아이와 함께 초영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이는 이미 초영의 도포 자락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부채 아저씨, 그냥 저리 내버려두어도 되는 거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묻는 아랑의 얼굴에는 측은함이 가득했다. 초영은 그런 아랑을 의아한 듯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답했다. "내가 아무리 도사라 한들, 어찌 죽은 자에게 손을 대느냐? 그들의 혼을 강제로 윤회에 넣을 수도 없고, 다시 살려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 있을 터. 저승 문지기들이 곧 올 것이다." 그의 말은 차가웠지만, 아랑은 그 속에서 도사로서의 뼈저린 한계를 엿볼 수 있었다. 그 어떤 신통력으로도 죽음의 섭리를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장면 전환: 초가집으로 돌아오다]


참혹한 마을의 풍경을 더 이상 어린아이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피와 죽음, 절망이 가득한 곳에서 순수한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을 초영은 용납할 수 없었다. 분명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또 다른 이들이 마을을 지나며 시신들을 수습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초영은 망설임 없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축지법을 이용해 한 치의 지체 없이 자신의 초가집으로 돌아왔다.


고요한 초가집의 아궁이에서는 은은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시골집 특유의 구수한 나무 타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당에 쌓인 눈 위에는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고, 텃밭에는 눈 모자를 쓴 채 겨울잠을 자는 채소들이 고요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화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었던 몸을 녹였다. 아랑은 조용히 백탄을 새로 채워 넣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이 잠시 멈춘 듯, 이곳만큼은 평화로웠다.


아이는 쏟아지는 눈물과 피로감에 지쳤는지 이내 초영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조그만 몸을 웅크린 채 평화로운 숨을 내쉬는 아이의 얼굴 위로 화로의 불빛이 아른거렸다. 초영은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악신, 그 정체불명의 존재… 그와의 조우는 단순한 요괴 퇴치를 넘어, 자신의 도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이 세상의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지켜온 도인의 길, 세상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올바른 도리인가. 그의 심장 속에서 깊은 고뇌의 파도가 일렁였다.


그런 초영의 진지한 모습은 아랑에게도 처음이었다. 평소 능청스럽고 여유로웠던 초영의 얼굴에는 인간으로서의 번민과 도사로서의 책임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아랑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화로 속의 백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던 불은 사그라지고, 이제 붉은 심지만이 은은하게 타오르는 듯했다. 이 세상의 운명이 마치 그 심지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 모든 침묵 속에서, 아랑은 비로소 초영의 도(道)와 그가 지고 있는 고독한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랑아."


초영이 잠잠하던 침묵을 깨고 아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진중했다.


"너는 여기서 이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거라. 마을의 시신 수습은 분명 다른 이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하나… 나는 아까 그 악귀 놈의 행적을 찾아봐야겠다. 그 존재가 이리 나타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니…."


초영은 말을 이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아무래도 이 전쟁은… 인간사의 전쟁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더 큰 혼란이 올 것이다. 이 아이를 잘 지켜야 해."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본분을 넘어선, 거대한 악에 맞서야 한다는 책임감이 묵직하게 실려 있었다.


아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영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그녀의 호기심에 찬 붉은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나도 따라갈 거야! 부채 아저씨 혼자 보내면 분명 또 알 수 없는 짓만 골라할 것 아냐! 아이는 누렁이가 돌보고 있으면 되지~ 누렁이가 이리 충직한데 무슨 걱정이야!"


아랑은 초영의 진지함과는 상관없이, 이 흥미진진한 여정에 동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묘한 장난기가 어렸다.


초영은 아랑의 간절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아랑이 이리도 쉽게 죽음을 무릅쓰는 여정에 동참하려는 인간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 혹은 **업(業)**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다. 홀로 가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이 길을 조금은 덜 외롭게 만들 것이라는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이 영물은 자신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존재였다. 하는 수 없이 초영은 긴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 너도 참, 그래… 함께 가자."


동이 트기도 전, 초영과 아랑은 길고 긴 여정을 떠날 채비를 했다. 잠든 아이 옆에는 누렁이가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들의 등 뒤로, 아직 밤의 장막이 걷히지 않은 검푸른 산이 묵묵히 서 있었다 새로운 운명이, 그렇게 또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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