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영의 연(緣), 아랑의 결(結)
깊고 깊은 산골짜기, 인적마저 희미한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어느덧 가을 햇살이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차갑도록 맑은 가을 공기, 그리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빛줄기는 이곳이 태초의 자연과 맞닿은 곳임을 알렸다. 이 적막한 숲속을 가르며 한 그림자가 순간이동하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푸른 구름 한 점이 땅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듯, 청량한 푸른 도포 자락이 스치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이미 수십 발자국을 앞서 있었다. 땅을 줄이는 신묘한 도술, **축지법(縮地法)**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열 발자국씩 껑충 뛰어 사라지는 환영으로밖에 보지 못했을 그 신통력이, 젊은 초영 도사의 손끝에서 유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초영은 서른을 갓 넘긴 듯한 훤칠한 키에 청아한 눈매를 가진 청년이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제법 고집 있어 보였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여유롭다 못해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듯한 능글맞음이 감돌았다. 그는 산길을 가로지르는 동안 한 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토록 바쁘게 축지법을 쓰는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해가 서산에 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 배고플 누렁이에게 밥을 챙겨주기 위함이었다. 산중에 홀로 사는 그에게 누렁이는 어엿한 가족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바로 저 뒤에서 몇 날 며칠을 끈질기게 쫓아오고 있는 여우 한 마리 때문이기도 했다.
붉고 탐스러운 털을 가진 그 여우는 초영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고 있었다. 초영이 축지법을 쓸 때마다 마치 저도 순간 이동하듯 빠른 속도로 숲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여우의 숨은 점점 가빠지고, 혀가 축 늘어져 침을 흘리며 헥헥거리는 모습은 보는 이마저 안쓰럽게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초영을 향한 끈질긴 열망으로 번뜩였다. '해묵리에서 잠시 농(弄)을 한 것에 이리 화가 난 것인가? 영물이란 알다가도 모를 존재로구나.' 초영은 여우의 끈질김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속으로는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깊은 산중에서 축지법을 쓰는 초영을 목격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저 붉은 여우만이 초영의 신묘한 도술을 따라잡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초영은 여우의 지쳐 쓰러질 듯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마침내 걸음을 멈춰 섰다. 녀석이 멈추자, 붉은 여우도 털이 푸석해진 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초영의 앞에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이내 그 몸은 붉은 기운과 함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더니,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화사한 붉은 한복을 입은 자태는 아름다웠으나, 숨이 너무 차서인지 변신한 후에도 고개까지 숙인 채 연신 헐떡거렸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이는 다름 아닌 구미호, 아랑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에는 젊은 구미호다운 도도함과 발랄함이 묻어났다.
"요녀석아! 왜 쫓아오는 게냐? 내 귀찮다고 하지 않더냐."
초영의 목소리는 은근한 장난기와 능청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흰 부채가 바람 따라 살랑였다.
"헉, 헉, 잠시만~~ 후…. 나는 니 녀석의 도술을… 흐… 내 것으로… 하려고…."
아랑은 숨을 고르느라 제대로 된 문장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땀과 피로로 범벅되어 있었지만, 초영의 도술에 대한 강한 열망만큼은 식을 줄 몰랐다.
"허허. 그 '뺏는다'는 표현보다, '머리 숙여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라 하니깐."
초영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아랑을 약 올리듯 말했다. 그의 푸른색 도포 자락이 바람에 살랑였다.
그 말을 듣고 숨을 고르던 아랑은 서서히 허리를 세웠다. 그녀의 붉은 눈이 초영을 향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내가… 내가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지! 응?! 네가… 구미호의 자존심을 알아?!"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존심 강한 구미호로서의 자부심과, 초영에게 쉽게 굴복하고 싶지 않은 강한 고집이 섞여 있었다. 아홉 꼬리를 가진 영물인 구미호에게 인간 도사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그녀는 앳된 얼굴과는 달리, 때때로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의 위엄을 드러냈다.
"그래~? 그럼 계속 그렇게 쫓아오시게."
초영은 아랑의 말에 다시 한번 빙긋 웃더니, 기다렸다는 듯 다시 축지법을 써서 아랑과 멀어져 갔다. 그는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아잇! 저 못된 도사놈이 진짜!"
아랑은 초영의 뒷모습을 향해 버럭 소리쳤지만, 이내 짜증을 내면서도 다시 붉은 여우의 모습으로 변해 그 뒤를 끈질기게 쫓아갔다. 그녀의 끈기가 초영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듯했다. 산속의 한바탕 추격전은 한 폭의 유쾌한 풍경화 같았다.
초영의 축지법이 멈춘 곳은 깊은 산속의 한 자락이었다. 지형이 험하고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에 자리한 초라해 보이는 초가집 한 채. 삐뚤빼뚤한 돌담이 전부인 작은 울타리 안에는 허름한 텃밭이 보였고, 그 옆에는 닭 몇 마리가 꼬끼오 하고 울어대는 닭장도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따로 굳건한 울타리를 둘 필요조차 없었다. 이 초가집의 작은 툇마루 앞에는 누렁이라는 이름의 진돗개 한 마리가 해묵은 솜이불처럼 푸근하게 배를 내밀고 하품을 하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길고 평화로운 낮잠을 즐기다 못해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코까지 골고 있는 모습이 푸근했다. 이 모든 풍경이 한 폭의 고즈넉한 그림 같았다. 인간의 속세와는 단절된, 마치 신선들이 노닐 법한 별천지 같기도 했다.
초가집이 있는 마당에 들어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초영이었다. 그의 뒤에는 금방이라도 실신할 듯 땀으로 범벅이 된 아랑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랑의 붉은색 한복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피로로 축 늘어져 있었다. 한 손으로는 허리께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연신 숨을 고르는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누렁아~"
초영이 다정하게 누렁이를 부르자, 녀석은 벌떡 일어나 꼬리가 떨어져 나갈 만큼 힘껏 흔들며 초영에게 달려왔다. 녀석의 덩치는 제법 컸지만, 초영 앞에서는 한없이 애교 넘치는 강아지였다. 초영은 녀석을 품에 안아 올리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누렁이의 얼굴에는 주인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이 가득했다.
아랑은 멍하니 누렁이를 보자 흠칫 놀랐다. 분명 개인데도 어딘가 예사롭지 않은 영물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 귀여운 모습에 본능적으로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 하얀 손가락이 누렁이의 머리에 닿으려던 찰나, 녀석은 낯선 여인의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크르릉!'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송곳니를 드러내며 적대심을 보였다. 녀석의 눈빛은 마치 "내 주인을 넘보는 자는 누구든 용서치 않겠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자 아랑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며 누렁이를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쳇! 나도 너! 별로야!"
여우와 개, 영물과 영물 사이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한바탕 벌어졌다. 이 깊은 산골에서 초영을 사로잡기 위한 아랑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된 셈이었다.
초영은 그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거… 둘을 보니 천생연분이구만. 개랑 여우랑. 하하핫!"
그의 농담에 아랑은 코웃음을 쳤지만, 그렇게 셋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고요했던 산속 초가집에 새로운 활기와 함께 티격태격하는 정겨운 소리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누렁이는 아랑을 향해 끊임없이 으르렁거렸고, 아랑은 누렁이를 째려보며 혀를 내밀었다. 초영은 그런 둘을 보며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아랑은 초영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도력(道力)을 지닌 도사임에도 불구하고, 도술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매일 직접 산에 가서 장작으로 쓸 나무를 해오고,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손수 지어 먹었다. 때로는 낡은 짚신을 꿰매고, 안 어울리게도 텃밭을 일구고, 닭에게 모이를 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산골 농부였다. 특히 저 누렁이를 마치 자신의 자식처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모습은 아랑의 눈에는 우습기까지 했다. '그냥 도술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례금만 받아도 편히 살 텐데. 왜 이 산중에서 직접 고생을 사서 하는지 말이다.' 아랑은 그를 볼 때마다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의아해했다.
"그 부채 아저씨."
아랑은 초영을 그렇게 불렀다.
"부채 아저씨는 왜 도술을 이용하지 않아? 그거 아랫마을 가서 써먹으면 돈 벌어서 편히 살 수 있지 않아?"
아랑은 한가하게 감자를 깎는 초영에게 심술궂게 물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툇마루에 앉아 초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초영은 장작으로 쓸 나무를 쪼개기 위해 윗저고리를 벗으며 도끼를 들었다. 그의 다부진 팔뚝 근육이 도드라졌다. 그는 아랑의 질문에 대꾸도 없이 능숙하게 나무를 쪼개어 장작으로 쓰기 좋게 만들었다. 묵직한 도끼가 정확한 지점에 내려찍힐 때마다 '퍽!' 하는 소리가 산골의 적막을 깼다. 시원하게 쪼개지는 나무를 보며 초영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몇 번의 도끼질을 멈춘 다음에야 초영은 아랑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이런 여러 재미난 것을 왜? 남이 해주길 바래?"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재밌어? 힘들기만 한 잡일 같은데."
아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편한 것을 추구하는 영물의 본성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초영은 잘게 쪼갠 장작 더미를 옆에 깔끔하게 쌓으며 아랑을 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랑의 심리 깊숙한 곳을 꿰뚫는 듯했다.
"인간 세상이 왜 힘든 줄 아느냐? 몸이 편하면, 번뇌가 찾아오지. 욕심이라는 번뇌 때문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한 연륜이 배어 있었다. 그의 나이답지 않은 깊은 통찰력은 아랑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
"욕심…?"
아랑은 그 말을 나지막이 되뇌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너 말 잘했다. 도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지. 그 첫 번째가 집안일이다. 가서 텃밭에서 상추랑, 고추 좀 따 놓아라."
초영은 무심한 듯 텃밭 쪽으로 고갯짓하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왜? 부채 아저씨! 빨리 도술이나 알려줘."
아랑은 발끈하며 따졌다. 구미호의 자존심을 굽히고 배우러 왔는데, 잡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초영은 그런 아랑을 보며 나지막이 타이르듯 말했다.
"지금 급하게 배우고자 하는 욕심. 안 돼. 우선 머리부터 비워야 해. 기생충처럼 붙어서 밥 얻어먹지 말고. 일해."
그의 단호한 어조에 아랑은 말문이 막혔다.
아랑은 입을 삐죽거리며 불평했다.
"쳇! 저 못된 도사놈! 두고 보자!"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하지만 초영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툇마루에 놓인 소쿠리를 팩 하고 옆구리에 끼고 터덜터덜 텃밭으로 향했다. 그녀의 뒤에서 초영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아랑의 뒷모습을 보며 초영은 우스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아랑의 미래가 보이는 듯했다. 초영의 가르침은 비단 도술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은 유수와 같아서, 계절은 어김없이 제자리를 찾아 흘러갔다. 초가집 지붕 위에는 어느덧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싱그러웠던 가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뼈를 깎는 듯한 추운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바람이 쌩하니 지나갈 때마다 초가집의 작은 창호문이 덜그럭거렸지만, 그 안은 온기로 가득했다. 밤이 깊어진 초가집의 방 안에는 따스한 화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초영과 아랑은 화로를 빙 둘러앉아 언 감자를 구워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치에는 누렁이가 배를 내보이고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누렁이는 아랑을 향한 적대심을 거두고, 이제는 어엿한 한 식구처럼 서로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가끔 아랑이 짖궂게 누렁이의 꼬리를 당기면, 녀석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대신 귀찮다는 듯 꼬리만 살랑 흔들었다.
아랑은 이제 초영에게 염동력을 배우는 중이었다. 특히 자신이 쏘는 비침(飛鍼)이 날아가면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연습하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촛대 위에는 초대신 노랗게 익은 감자가 올려져 있었다. 아랑은 정확히 촛대 위의 감자를 맞히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직선으로 날아간 비침이 허공에서 꺾여 감자에 정확히 박히도록 연습해야 했는데, 번번이 빗나가서 옆의 벽에 '콕!' 하고 박혀 버렸다. 벌써 벽에는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오! 짜증 나! 왜! 자꾸 빗나가!"
아랑은 온갖 짜증을 부리며 투덜거렸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집중과 짜증으로 구겨져 있었다.
그 옆에서 초영은 화로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감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후후 소리를 내며 묻은 숯을 털고는 크게 한 입 깨물어 먹었다.
"거 참, 승질 머어리 하고는…."
초영은 뜨거운 감자를 식히느라 입으로 바람을 불면서도 아랑을 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 씹어 삼키고 말해!"
아랑은 초영의 흐리멍덩한 말에 눈을 흘겼다. 둘의 이런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이제 이곳 초가집의 정겨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바닥에 편안히 잠들어 있던 누렁이가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경계하듯 방문 앞으로 가서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낮은 으르렁거림이 누렁이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아랑도 문득 냉랭하고 음침한 기운을 느꼈는지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초영은 태연하게 감자를 먹고는 염력으로 방문을 스르륵 열었다. '휘이잉~!' 소리와 함께 겨울의 매서운 찬 바람이 방 안으로 거세게 들어왔다. 방문 앞의 툇마루에는 10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잔뜩 웅크린 채 서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온통 눈에 덮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아가… 무슨 일인데, 이 깊은 산속까지 왔니?"
아랑은 굳었던 얼굴에 생긋 웃음을 띠고 따뜻하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소녀의 마음을 녹이는 듯했다. 구미호에게도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연민은 존재했다.
아이는 아랑의 따스한 말에 잔뜩 긴장했던 것이 풀렸는지, 차가운 볼 위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랑… 어머니랑… 마을 사람들이… 흐흑… 저는 나물 구하러 산에 다녀왔는데… 흑…."
소녀의 목소리는 추위에 떨리는 작은 새처럼 가늘게 떨렸다. 얇은 저고리 너머로 앙상한 어깨가 들썩였다.
"아가… 이리 들어와…."
아랑은 꽁꽁 얼어붙은 아이의 몸을 녹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초영은 말없이 화로 옆 따뜻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는 침착했지만, 소녀의 눈빛에서 범상치 않은 일을 직감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랑의 따뜻한 손길을 뿌리치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가서 우리 마을 사람들 좀 도와주세요… 흑…흑…."
소녀의 눈썹에까지 얼어붙은 눈이 맺혀 있었지만, 추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저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것이 얼마나 급하고 절박한 마음인지 초영과 아랑은 알 수 있었다. 소녀의 작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초영이 차분하게 물어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냉철했지만, 그 속에는 은근한 염려가 묻어 있었다. 그는 소녀에게 눈을 맞추며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있어요. 흐흑흐흑…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에요… 엉엉~!"
소녀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녀의 작은 손은 무언가를 가리키듯 허공을 헤매었다. 공포에 질린 작은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초영과 아랑에게까지 들리는 듯했다.
초영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랑을 등에 업은 채, 한쪽 옆구리에는 작은 소녀를 꼭 끼고 축지법을 이용해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말하는 마을은 가끔 초영이 적적할 때 내려가 보던 곳이었다.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막걸리 한 잔을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던 정겹던 곳이었다. 달리는 속도는 매우 빨랐고, 셋은 마치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듯했다.
"부채 아저씨! 천천히 가면 안 돼? 도착하기 전에 얼어 죽겠어!"
아랑은 콧물을 훌쩍이며 투덜거렸다. 초영의 등에 업혀 있었지만, 매서운 바람은 피할 수 없었다. 아랑은 초영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니, 내 따라온다고 하지 말랬잖느냐…. 다 왔다."
초영은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의 표정은 이미 싸움터에 임하는 장수의 그것처럼 비장했다. 옆구리에 끼여 있던 아이는 그저 꼭 눈을 감고 있었다. 초영이 자신의 마을 사람들을 반드시 도와주리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작은 손이 초영의 도포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축지법이 멈춘 곳은 처참하게 변해 버린 마을이었다. 눈 덮인 고즈넉한 겨울 마을은 한 폭의 지옥도처럼 변해 있었다. 도적 떼들이 휩쓸고 간 듯, 곳곳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고, 몇몇 초가집은 불을 질렀는지 한겨울에도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활활 불타고 있었다.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피 냄새가 섞인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새하얗던 눈밭은 사람들의 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초영과 아랑을 이끌고 온 아이는 시체들 사이를 헤매며 자신의 부모를 찾는지, 목 놓아 부르며 울부짖었다.
"아빠! 엄마! 어디 있어요!"
그녀의 절규는 얼어붙은 대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어린 소녀의 비명은 무력하게 널브러진 시체들 위로 메아리쳤다.
초영은 마을을 둘러보았다. 시체들 몸에 박힌 화살, 사방에 흩뿌려진 화약 냄새, 그리고 시체들의 처참한 상태로 보아하니, 단순한 도적 떼의 소행이 아니었다. 왜적(倭賊), 즉 왜인들이 조직적으로 자행한 침입임이 분명했다. 그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같은 민족의 무고한 죽음 앞에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그의 가슴은 격렬하게 울렁거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저 악귀 같은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도(道)를 닦는 도사였다. 인간 세상의 전쟁에 그가 직접 나서야 하는지, 아니면 도(道)의 길을 걸으며 관망해야 하는지,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것 또한 인간들의 일이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 도를 깨달아 세상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도인의 본분이라 배웠거늘… 피 끓는 육신으로 이 싸움에 나서는 것은 어리석은 감정에 휩쓸리는 것이 아닌가? 나의 도술은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써야 할 뿐, 인간의 탐욕으로 벌어진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닐까? 하지만… 내 눈앞에서 무고한 백성이 고통받고 무참히 죽어가는 것을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미 아비를 잃은 저 어린아이의 눈물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으랴. 도(道)란 그저 세상의 일을 외면하고 홀로 고고하게 사는 것만을 뜻하는가? 백성의 고통 또한 이 세상의 조화에 큰 영향을 미치거늘… 어찌 이를 좌시할 수 있으랴. 내 비록 영생의 도를 닦는 도인이지만, 이 조선 땅에서 태어나 이 백성의 숨결을 먹고 자랐거늘. 이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의 도(道)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깊은 번뇌에 잠겼다. 이마에는 번뇌의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미 이곳을 휩쓸고 지나간 듯, 적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영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쫓아가서 저 악귀 같은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도포 자락에 스며든 피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부채 아저씨! 저게 뭐야?!"
아랑의 날카로운 외침이 초영의 번뇌를 끊어 놓았다. 저 멀리, 눈 덮인 들판에서 시체들이 뒤척이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다른 시체가 또 꿈틀거리고…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조종하는 것처럼, 마치 죽음의 춤을 추는 것처럼 기괴하게 움직였다. 아랑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섬뜩하고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초영은 그 모습을 보고 단번에 직감했다. '요괴? 혹은 영적인 존재?' 그것은 분명 보통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양손 검지와 중지로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감았다. 다시 뜬 눈에는 순간 세상이 흑백의 색만 있는 듯 보였다. 모든 색이 사라지고, 오직 명암과 기운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방금 죽임을 당한 시체들 옆에서, 자신들이 죽은 것에 대해 슬퍼하는 영혼들이 흐릿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영혼들도 보였다. 마치 살아 있을 때의 모습 그대로 고통과 슬픔에 갇힌 채 떠도는 영혼들이었다.
그런 영혼들을 탐욕스럽게 '잡아먹는 듯해 보이는 정체 모를 이상한 것'이 초영의 흑백 시야에 들어왔다. 무학산에서 이사장의 몸을 떠났던 그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검은 아지랑이로 이루어진 구체, 그 가운데에는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구체에는 긴 다리가 달려 있었다. 기어 다니는 다리라고 생각되는 그것은 구체의 몸보다 세 배는 길었고, 매우 얇았다. 마치 네 발 달린 거미처럼, 뒤틀리고 꺾인 다리들이 섬뜩하게 움직였다. 그것은 시체들 위를 유영하며 영혼들을 뜯어먹는 듯 보였다.
'저건 무엇인고?' 초영은 의아해했다. 조선 시대의 고서에도, 자신이 수련하며 깨달은 지식에도 저런 형태의 요괴는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에 아랑도 궁금한지 초영의 팔을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불쾌감이 뒤섞여 있었다.
"뭔데? 응? 아씨. 뭐야. 부채 아저씨만 볼 수 있는 거야?"
아랑은 답답함에 초영을 재촉했다. 콧잔등을 찡긋거리는 것이 영락없는 말괄량이 아가씨였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성가셨는지, 초영은 한숨을 쉬더니 아랑의 눈에도 도술을 부려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영의 도술이 아랑의 눈에 닿자마자, 아랑의 눈빛이 흔들렸다. 흑백으로 변한 시야 속에서, 혼령들과 그것들의 움직임이 그녀의 눈에도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리고 영혼들을 탐하는 그 끔찍한 검은 구체의 실체도 보였다. 아랑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다.
"엄마!? 저게 뭐야!?" 아랑의 비명 같은 외침이 눈 덮인 겨울 마을에 차갑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