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신(神)을 부정하는 자, 악귀의 검은 창
6. 신(神)을 부정하는 자, 악귀의 검은 창
시간이 지날수록 왜군들의 발자국 소리가 산 아래에서부터 점차 가까워져 왔다. 새벽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산등성이를 비출 무렵, 마침내 왜군 본대가 진천읍 초입에 당도했다. 수많은 병사들이 마치 거대한 벌레 떼처럼 산길을 메우며 물결치듯 밀려오는 모습은 압도적인 위압감을 선사했다. 그들의 침묵 행군만큼이나 섬뜩한 광경이었다.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진군을 지휘하던 왜군 장수가 돌연 말에서 내려서 대열의 한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번쩍이는 갑옷 아래, 그의 눈에는 이전보다 더욱 짙고 불길한 어둠이 서려 있었다. 그는 거대한 키만큼이나 긴 창을 굳건히 들고 손을 높이 들어 어떤 지시를 내렸다. 그의 손짓 하나에 수많은 병사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췄다. 흙먼지가 잠시 휘날리다 잦아들었다.
그러자 그들이 길을 터주며 나타난 것은, 말에 올라 긴 창을 들고 있는 기마병 열 명 정도였다. 그들은 맨 선두에 서서 도열했다. 그들은 만복 일행과 싸움이 있었던 검은 정찰병과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군복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얼굴은 검은 두건으로 완전히 가려져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갑옷 사이로 드러난 눈빛은 어떤 목적이나 욕망도 찾아볼 수 없는 텅 비고 공허한 시선이었다. 마치 주인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꼭두각시 인형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텅 빈 눈빛 속에서 섬뜩한 살기(殺氣)가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성과 감정을 제거당한 채 오직 살육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그들의 전신을 감쌌다.
맨 앞에 나선 검은 기마병들은 장수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의 말 또한 마치 전신에 강철을 두른 듯 육중하고 검은 색깔이었다. 그때였다. 그들의 뒤편에 서 있던 왜 장수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이전보다 훨씬 더 거세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화산 폭발 전 지열이 솟아오르듯, 장수의 갑옷 틈새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 검은 아지랑이는 곧 십여 명의 검은 기마병들에게 흩어져 스며들었다. 검은 연기가 그들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기마병들의 공허했던 눈빛에 일렁이는 붉은 기운이 피어났다. 입에서는 마치 시린 겨울바람을 가르듯 거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제 곧 사냥을 시작하려는 듯, 그들의 육체는 팽팽한 살의로 가득 차 올랐다.
바로 그때, 그들의 진격을 막아서듯 초영과 아랑이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 햇살을 등지고 나타난 그들의 모습은 왜군 병사들에게는 환영(幻影)처럼 기이하게 느껴졌다. 초영은 소매에서 부채를 꺼내어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하게 펼쳤다. 그리고는 부채를 천천히 들어 올려 앞으로 휘두르며 마치 멈추라는 듯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 그 뒤의 아랑 또한 천천히 소매에서 날카로운 **비침(秘鍼)**들을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침은 보통 침과 다르게, 영적인 기운을 담아 상대의 혈(穴)을 끊는 데 특화된 아랑의 특수 무기였다.
그러나 검은 기마병들은 초영의 경고성 부채질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영을 그저 나약한 조선의 선비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그들을 무시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애초에 그들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남아있기나 한 걸까? 마치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살육 병기처럼,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더욱 격렬하게 땅을 박차고 초영과 아랑을 향해 돌진했다. 말발굽이 땅을 울리며 전장을 흔들었다.
[초영의 일격과 아랑의 비침]
빠르게 달려드는 기마병들에게 초영은 더 이상 경고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일순간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는 부채에 염력(念動力)을 실어 크게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기마병들의 진로를 가로막은 듯했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선두에 선 기마병 몇 명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말과 함께 나뒹굴며 쓰러졌고, 몇몇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말과 함께 그대로 쭈욱 밀려나 수십 길 밖으로 날아갔다. 땅에 부딪힌 그들은 끔찍한 파열음을 내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 압도적인 위력에 왜군 본대의 병사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감히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장면이었다.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왜 장수 또한 눈빛이 변하며 놀란 듯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분노와 함께 의외의 상황에 대한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뒤로 밀려났던 검은 기마병 셋은 이내 자신의 말의 고삐를 낚아채듯 잡고 다시 몸을 추슬렀다. 그들은 쓰러진 병사들을 돌아볼 새도 없이 다시 말을 박차며 초영에게 달려들었다. 말의 거친 발굽이 땅을 세차게 때리며 돌진하는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아랑은 왼쪽 편으로 날렵하게 뛰면서 손에 쥐고 있던 비침 들을 그들의 눈을 향해 던졌다. 파팟! 두 개의 비침이 한 기마병의 눈을 정확히 명중했지만, 나머지 두 기마병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아랑의 비침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달려들었다. 비침을 눈에 맞은 기마병은 잠시 움찔하기만 할 뿐, 고통도 없이 초영을 향해 멈추지 않았다. 그 셋의 기마병들은 처음부터 초영을 노렸다는 듯, 아랑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창을 찌르며 달려들었다.
초영은 그 자리에서 마치 공중에 멈춰 서 있는 듯이 가볍게 뛰어올라 창을 피했다.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띄운 그는 그대로 찔러들어온 창들을 사뿐히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는 허공에서 펼쳐진 부채로 찔러 들어왔던 세 명의 목을 마치 베어내듯 휘둘렀다. 그의 부채 끝에서 섬뜩한 푸른빛이 번뜩였다.
툭, 툭, 툭.
메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 개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목만 남아버린 검은 기마병들의 몸뚱이는 말 위에서 끔찍하게 피를 뿜어냈다. 목 없는 몸통에서 분수 같은 피가 솟구쳐 나와 새벽하늘에 흩뿌려졌다. 마치 붉은 안개비처럼 피가 내리는 것이다. 눈이 쌓인 겨울 산은 순간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잘린 목과 몸뚱이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솟아 나왔다. 그 아지랑이는 마치 주인을 찾는 영혼처럼 왜 장수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날아가 흡수되었다.
초영의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한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가 사람의 목숨을 너무도 간단하게 해하는 모습을 처음 본 아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저리도… 무감하게….' 놀람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평소에는 늘 너스레 떨며 미소를 짓던 친근한 '부채 아저씨'가 아닌, 냉혹하고 섬뜩한 다른 존재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등에서는 한기가 서려 나왔다.
아랑이 잠시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말에서 떨어져 있던 다른 검은 병사 하나가 그녀의 뒤를 노리고 창을 찔러 들어왔다. 죽음을 부르는 창의 섬뜩한 기운이 등 뒤에서 덮쳐왔다. 찔러 들어오는 창을 아랑은 마치 여우처럼 날렵하게 옆으로 뛰며 피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와 동시에 두 개의 비침을 상대의 눈을 향해 던졌다. 파팟! 정확히 명중! 검은 병사의 두 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병사는 고통을 모른다는 듯,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아랑의 발소리를 따라서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분명 동작이 잠시 멈춰야 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아랑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방심한 듯했다. 잠시의 빈틈이 죽음으로 이어질 뻔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때, 어느샌가 아랑의 옆에 다가와 휘둘러 오는 창을 가볍게 부채로 튕겨 내는 초영.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부드러웠다. 챙!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창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초영은 부채를 활짝 펼쳐서 그대로 펴진 부분으로 병사의 목을 찌르듯 공격했다. 부채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푸른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털썩!
순식간이었다. 부채 위에는 잘린 목만 남아 있었고, 몸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끔찍한 모양으로 널브러졌다. 부채 위에 남아 있는 병사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고, 두 눈에는 아랑의 비침이 정확히 박혀 있었다. 초영은 부채 위에 차마 못 볼 것이라도 올려져 있었다는 듯, 무심하게 부채를 탁 털며 잘린 머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부채에 묻었을지도 모를 핏물을 털어내기 위해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부채에는 핏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초영은 방심해서 놀라 토끼 눈이 되어 있던 아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함께 약간의 질책이 섞여 있었다.
"거 참… 신경 쓰이네~ 저리 가 있거라. 아까 네 비침을 맞고도 나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았으면, 눈치를 챘어야지."
말을 마치는 동시에 초영은 아랑의 허리를 가볍게 안았다. 그의 손길은 놀랍도록 섬세했다. 그리고는 입구 초입에 있던 거대한 소나무 위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눈 깜짝할 새에 둘의 몸이 사라졌다가 나무 꼭대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영은 아랑에게 잠시 씨익 미소를 보이고는 그녀의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한 번 더 말했다.
"보고만 있거라~"
[초영의 결의, 장수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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