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고리2 08화

제2부. 태백산행: 신물(神物)을 찾아서(1)

1. 설중의 은신처

by 끄적쟁이

1. 설중의 은신처


[설산, 필사의 도주]


눈 덮인 하얀 산속은 더욱 어두웠다. 사방을 집어삼킬 듯한 심연의 어둠 속에서, 아랑은 방향이 어느 곳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이정표 하나 없는 설산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칼날 같은 바람이 폐부를 꿰뚫는 듯했다. 그녀의 뒤를 끈질기게 쫓아오던 왜군 기마병들을 따돌리기 위해, 그저 죽을힘을 다해 더욱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왔을 뿐이었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와 초영의 축 늘어진 무게, 그리고 뒤쫓아 오는 죽음의 기운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흐읍, 흐읍..."


아랑의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에 흩어졌다. 우선 이 매서운 추위를 피해야 했다. 그녀는 비록 인간의 몸이었지만 구미호 특유의 뛰어난 감각으로 침착하게 산세를 살폈다. 조그마한 동굴이라도 있다면, 그 안에 들어가서 오늘 밤을 보내고 모닥불의 온기 속에서 잠시라도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녀의 어깨에 메어진 초영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랑이 눈을 감고 온몸의 감각을 집중하여 산세를 확인하자, 동쪽 능선쯤에 나무가 없이 바위들이 즐비한 곳이 보였다. 검은 그림자처럼 솟아오른 바위들은 험준했지만, 그 틈이라면 잠시나마 피할 곳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저 바위들 틈, 어느 곳이라도 숨어들어 이 매서운 밤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아랑은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더욱 깊은 밤이 되기 전에, 의식을 잃은 초영을 업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간보다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다고 해도, 초영은 건장한 사내였다. 게다가 상처투성이인 그를 업고 눈 쌓인 산을 오르는 것은 구미호인 아랑에게도 버거운 일이었다. 하얀 입김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의 어깨는 감각을 잃어갔다.


'젠장, 부채 아저씨! 제발 무사해야 해... 죽으면 안 된다고...!'


그녀의 심장은 초영의 생명력과 자신의 영력이 연결된 듯 격렬하게 뛰었다. 이 무겁고도 소중한 존재를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일념이 그녀의 지친 몸을 움직이는 유일한 힘이었다. 한참을 오른 끝에, 점찍어 놓았던 바위들이 있는 곳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계룡산 산채, 무녀 백현설]


간신히 바위 언덕에 올라서자, 아랑이 예상했던 돌무더기 틈새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뜻밖에도 산채(山砦), 즉 산속의 외딴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험준한 바위 지대에 숨겨지듯 자리한 초가집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 있는 듯했으나 주변에는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랑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조급해했다.


'어떻게 된 거지? 누가 있는 거야!'


바로 그때였다. 산채의 뒤쪽, 거대한 바위 뒤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로 이 늦은 밤에, 이런 험한 곳까지 오셨나요?"


달빛에 비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는 마치 불심 깊은 부처처럼 온화했고, 몸동작 하나하나에서는 흙먼지 묻은 산골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기품이 느껴졌다. 머리는 아직 틀어 올리지 않고 길게 늘어뜨린 댕기가 그녀가 혼례를 치르지 않은 처녀임을 알게 했다. 그러나 앳된 얼굴과는 거리가 먼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으로 보아 혼기를 놓쳤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이 아닌 듯했다. 특히 눈가의 강렬함은 그녀의 굳건하고 강인한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런 깊은 산골에 홀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아랑에게는 미심쩍게 다가왔다.


하지만 초영의 치료가 급했다. 아랑은 더 이상 망설일 틈이 없었다. 자신이 업고 있는 초영을 등을 돌려 여인에게 보여주며, 도움을 간청하는 절박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이 사람 좀 살려줘요..."


여인의 눈빛에 순간적인 연민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차니, 일단 안으로."


그녀의 부축과 함께 아랑은 초영을 산채의 방안으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초영을 똑바로 눕혀주자, 아랑은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을 보며 다시금 걱정 가득하고 조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 이 사람을 또 만나게 될 줄이야."


갑작스러운 산채 주인의 말에 아랑은 놀랐다. 그녀의 말은 마치 초영과 예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했다. 아랑이 의아한 표정으로 초영과 여인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였다. 산채 주인의 입에서 더욱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앞에 구미호분은 어찌 이 사람과 다니시나요? 그리고 험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장군님께서 굉장히 불편해하십니다."


아랑은 순식간에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보는 여인의 통찰력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구미호라고? 헉, 나 들킨 거야?!'


그리고 뒤이어 들린 '장군님'이라는 말에 아랑은 다시 한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초가집 방 안에는 제단처럼 꾸며진 공간이 있었고, 낡고 오래된 병풍 뒤에는 거대한 그림자 형상의 신장이 그려진 탱화가 걸려 있었다. 이곳은 틀림없이 무당의 신당이었다.


아랑은 할머니에게 천존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먼 옛날, 인간의 땅과 하늘을 잇는 천계를 다스리며, 세상의 모든 부정하고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위대한 수호신. 억눌리고 힘든 이들을 굽어살피고, 어둠에 물든 혼들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준엄하고 강직하여,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거짓됨도 용납지 않는 깐깐한 성격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늘 천존장군이 모셔진 곳은 정기가 강하여 함부로 들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었다. 그런 강한 신을 모시는 신당에서 자신의 여우 기운과 몸 안에 품은 검은 구슬을 감지하다니, 이 무녀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천강여무 백현설(天降女巫 白現雪)의 치유와 여우구슬 정화]


산채 주인인 무녀는 지체 없이 초영의 상처를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잘게 다진 약초를 덧대어 옆구리와 허벅지에 정성껏 붕대를 감아주었다. 아랑은 그 옆에서 무녀의 섬세한 손길을 유심히 바라보며, 혹시 도울 것이 없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초영의 상처보다 무녀와 초영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무녀의 치료가 어느 정도 끝이 났는지, 그녀는 두툼한 이불로 초영의 몸을 따뜻하게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아랑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부담스러웠다. 아랑은 구미호의 천년을 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무녀 앞에서 왜인지 꼼짝을 못 하는 듯 보였다. 무녀는 천천히 손을 뻗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구슬 이리 줘 보시지요."


아랑은 무녀의 요구에 순간 움찔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구슬을 감싸 쥐며 말했다.


"네? 구슬을 왜요? 이걸 함부로 어떻게..."


**여우구슬(狐珠)**은 구미호에게 있어 단순히 힘의 원천을 넘어선 존재였다. 인간의 정기·혼·생명력을 응축하여 만들어지는 구슬로, 이는 구미호의 본질 그 자체이자 오랜 세월 수련을 통해 얻는 핵심 매개체였다. 구슬을 흡수하거나 삼키는 것으로 수련을 쌓아 인간이 되기도 하고, 혹은 모든 힘을 잃고 짐승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구미호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런 소중한 구슬을 타인에게 건네는 것은 목숨을 내어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구슬 안에는 흡수된 악한 기운들이 가득하여 더욱 위험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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