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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아코알라 Jan 05. 2016

 두 나라 사이에서

| 프롤로그

요즘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생각하고 또 실제로 이민을 떠난다. 하지만, 그들은 떠나기 전 무엇을 생각 할까? 한국인으로서 타지에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할까. 아니면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국민이 되어 잘 적응하고 살 거라 생각할까.


나는 이민 가기 전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특히, 평생 눌러 살러 간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영어에 문제가 없어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으니 만사 걱정이 없었다.


처음 몇 년간은 호주 억양과 생활 관습 등에 익숙하느라 바빴다. 나의 정말 튀는 미국스런 발음도 스스로 조금은 중성화하는 데 노력하여 고쳤다. 미국 사람도 아닌데 미국 사람 같은 발음을 가지고 있는 게 호주에서 왠지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미국인들이 호주에서 그다지 존경이나 부러움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보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그 문화에 조금 익숙하게 되었고, 그 후 몇 년은 어린 내 아이들을 키우느라 또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사이 나는 석사도 마쳤고, 언어 관련 자격증도 땄고, 직장 경력도 쌓았다.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겠구나 하고 허리를 펴니 어느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있었다.


한국을 유감없이 떠나왔던 서른에는 파스타와 샌드위치만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지만 마흔을 바라보던 나는 된장찌개를 너무나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몸은 타국에 있어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혹자는 몸은 타국에 있어도 죽을 때는 고국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 정도 멀리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어도 언젠가 나는, 나의 호주에서의 십여 년의 삶을 돌아보며 자문해 보았다. “이곳의 호주 생활이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 살만한 가치가 있었는가”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호주에서의 삶이 조금은 지긋지긋했다. 정말 비싼 물가, 세금, 집세, 공과금, 불편한 병원…둘이서 맞벌이를 해도 호주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남편은 꽤 급수가 높은 공무원이었고 나도 그렇게 벌이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냥 평생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게 싫었다. 그것도 온전한 호주인도 아닌 ‘이방인’ 같은 이민자로.


호주의 자연과 여유로움을 위해 많은 한국인들은 고국의 직업을 버리고, 어렵게 아이엘츠 시험을 준비하고, 이민을 준비하여 떠난다. 하지만, 그들은 호주의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게는 호주가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이유가 없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의 호주였지만, 나는 자연을 잘 찾아다니지도 않는 조금은 ‘히키코모리’과였다. 게다가 그 물가 비싼 호주에서 여유로이 이곳저곳 여행 다닐만한 여유도 사실은 없었다.


여전히 우리 둘은 학자금을 갚고 있었고, 나는 겨우 석사를 끝냈으며, 남편은 여전히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남편이 박사를 마치고 호주에서 어렵게 교수가 된다 하더라도 교육에 대한 열정도 없는 나라에서 선망의 직종도 아닌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머나먼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즈음이었다. 내가 무척 한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던 게. 아니, 한국이 그리웠다기보다는 더 이상은 이방인이 아니고 싶어졌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정말 운 좋게도 남편은 한국에서 직장을 얻게 되었고 우리는 그 이듬해 한국으로 반영구 귀국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3년만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다시 호주로는 돌아가고픈 마음이 조금도 없었음을 이제 와서 고백한다.


더 이상은 이방인이지 않아도 된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에 왔지만 십 년이나 해외에서 살다 들어온, 게다가 국적마저 잃은 나는 이곳에서도 한국인이 아니었다. 말도 많이 바뀌어서 비속어가 난무하는 ‘내 나라’ 말 조차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엄마 아빠가 한국 국적이 없는 아이들의 비자를 신청하려고 하니 아이들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여야 한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한국에 이름을 올릴 곳이 없었다. 다른 지방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 아래 이름이 올려지면 다른 지방에서 취학통지서가 나올 터였지만 정부 기관은 법조문만 여러 차례 읽어주며 다른 방도가 없다 하였다.


정말로 가방을 싸서 호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내 고국이었지만 더 이상은 ‘내 고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한없이 슬퍼졌다.


한동안 호주 국적을 포기하고 다시 한국 국적으로 이곳에서 살 것인지, 다시 호주로 돌아가 고국을 그리워하지 않고 살 것인지 많이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자리 잡고 살고 있다. 내가 쉽게 호주 국적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는 국적을 한국으로 되살린다 하더라도 내가 온전한 한국인으로 살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 글 모음의 호주 편은 내가 호주에 십 년간 살면서 직간접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쓴 실화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 편은 다시 한국에 돌아와 느꼈던 점들을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다.

오래전에 쓰고도 수년간 서랍에서 잠자던 글들을 이제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끄집어내어 나누는 이유는 누군가에게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부디 호주 살다 온 옆집 아줌마의 얘기를 듣는다는 편안한 기분으로 읽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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