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주 편
이민자와 영어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때는 아마도 내가 배낭여행을 다니던 90년대 중후반이 아닐까 싶다.
캐나다에 도착하기 전까진 주로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인생 경험도 했었다. 그런데, 캐나다에 도착해 일자리를 찾고 있었을 때,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왔다.
내가 영어를 가르치기로 했던 가족의 아저씨는 청소업을 하셨고, 아주머니는 홈스테이를 하셨다. 아저씨는 업무상 그다지 영어를 많이 쓰거나 잘 할 필요는 못 느끼셨던 것 같았고, 아주머니도 집에서 한국인들만 홈스테이를 하니 영어를 쓸 일이 정말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국서 영어를 가르치던 사람이 왔다고 하니 호기심에서였을까, 답답한 영어를 한국어로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내게서 과외를 받겠다고 하셨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어떤 교재로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청 기초부터 했었던 것 같다. 두어 달 정도 열심히 과외를 해 드리다, 토론토의 겨울이 너무나도 추워서 그만 더 따뜻한 곳으로 무책임하게도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 두 달 내내 수업을 하면서 '영어를 쓰는 캐나다에서 10년 가까이 사신 분들이 어떻게 이렇게 영어를 못할 수가 있을까' 궁금했었다.
당시 한때의 궁금증이었던 것이, 호주에서 10년간 이민자들을 가르치고 살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민자들의 영어가 대략 네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느꼈다.
첫째. 아예 거의 한마디도 못하는 부류
둘째. 기본 의사소통만 할 수 있는 부류
셋째. 아주 깊은 얘기는 빼고 웬만큼은 대충 다 하는 부류
넷째. 정말 훌륭하도록 잘하는 부류
1. 아예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참 많았다. 물론, 이들은 주로 직업이 없거나 거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어울리는 사람들은 거의 백 프로 한국인이었다. 이들의 영어가 잘 늘지 않는 이유는 호주 선생님이 영어로 설명하며 가르쳐주는 영어는 너무 알아듣기 힘들고, 또 혼자 독학으로 공부하기도 힘든 레벨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만 지나면, 많은 한국인들을 알게 되어 그다지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2. 기본 의사소통만 할 수 있는 경우는 대부분 무료 영어수업에도 참석하고, 다양한 노력도 해 보지만 역시 빨리 늘지는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눈칫밥이 늘어서 생활이 별로 불편하지 않다. 간단한 일이라도 시작할 경우엔 집안일과 직장과 더불어 영어까지 시간을 할애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물론, 나는 늘 절실함이 부족하다고 타박했었지만.
3. 웬만한 얘기는 다 할 수 있는 부류. 이들은 한국인들과도 잘 어울리고 많은 호주인 친구들도 사귄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종종 자신감이 넘친다. 이들은 당연히 현재보다 더 잘하면 좋겠다 바라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금방 실현될 것 같지는 않으니, 어느 정도는 그 수준에 안주하는 것 같아 보였다. 이들은 앞 두 부류보다는 좀 더 많이 생계에 도움이 되는 단기과정 (바리스타, 플로리스트, 차일드 케어, 행정사무과정 등)을 밟았다. 생활에 큰 불편함이 없었으니까 영어를 더 깊이 파고들어가기보다는,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단기과정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4. 마지막으로, 정말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에서 토익이나 토플 등의 시험으로 치자면 만점 가까이 기본으로 받는 사람들, 학교 다닐 때 영어 꽤나 잘했던 사람들, '하늘'대학 출신으로 공부가 몸에 밴 사람들... 이런 사람들 중에 영어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을 나는 여럿 봤다. 이들 중엔 거만한 사람도 있었고,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은 늘 더 잘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선 비슷했다. 물론, 생활의 불편함을 넘어서 이민사회의 엘리트 일원으로 호주인과 동일한 대접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부류였다. 실제로 가장 호주 주류사회에 쉽게 진입하여 비교적 잘 적응해가는 이상적인 부류이기도 했다.
한국에만 산 사람들은 호주에 10년 산 사람보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호주 십 년이나 살았으면, 영어 엄청 잘하시겠네요?"
호주에 10년 이상 살았던, 호주인 남편을 둔 지영이 언니는 어린애들이 셋이나 되었는데, 언니와 그들과의 대화는 참으로 신기한 언어의 조합이었다. 예를 들자면, 늘 이런 식이었다.
"헤이, 요셉. 왓 디드 엄마 세이? 엄마 톨드 유 오빠 슈드 돌봐줘 동생. 두 유 리멤버? 엄마 세드 투 유, 메니 메니 타임스...(Hey, 요셉. What did 엄마 say? 엄마 told you 오빠 should 돌봐줘 동생. Do you remember? 엄마 said to you, many many times...)
역시 호주 산 지 10년이 훨씬 넘은 호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나온 정연이 언니는 내가 만날 당시만 해도 호주 공무원이었지만, 어느 해 인가부터는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영어공부를 한다고 했다. 자신은 기초가 안 된 것 같다면서 한국서 그 유명했던 맨투맨 문법책까지 공수해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언니가 우체국에 파트타임으로 취직을 했는데 나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월급도 훨씬 많이 주는 전직을 왜 버리고, 우체국에서 소포 부치고 우표 파는 너무나도 단순한 일을 하는지... 내 그런 궁금증에 언제인가 언니는 이런 답을 주었다.
"난 공무원 생활할 때 보고서 쓰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거든. 거의 매일 영어 에세이를 쓰는 거였으니까. 사람들은 내가 여기서 고등학교, 대학교 나왔으니까 영작을 아주 잘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난 아직 그게 어렵거든. 6급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했는데 그 이상으로 승진을 하면 내가 담당자가 되잖아. 그게 난 너무 감당하기가 어렵더라고. 아무튼, 지금은 돈은 많이 못 벌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너무 편해. 영어 스트레스가 없어서. ㅎㅎ"
호주에 10년 가까이 살고 있던 40대의 예나 씨는 (객관적으로는) 그다지 영어를 잘 못했지만, 그녀는 웬일인지 한국인들과의 사이에서도 자주 한국어에 영어를 섞어 썼다. 정말 잘 알아듣기 힘든 그녀의 영어를 차라리 한국어로만 해줬으면 하고 바랬지만, 종종 주위 사람들에게 반쪽짜리 영어로 당당히 교정까지 해 주는 모습에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부러웠던 근원 모를 자신감이었다.
영어는 그 언어를 쓰는 나라에 간다고 저절로 느는 게 절대 아니다.
물론, 간단한 생활영어 정도는 늘 것이다.
매일 듣고, 매일 쓴다면.
하지만, 조금이라도 중급 이상의 고급 영어를 쓰고 싶다면 자신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외국을 가면 영어가 는다고 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그곳에 가면 영어가 저절로 느는 게 아니라
내가 공부를 한 것이 그곳에서 직접 듣고, 쓸 수 있는 체험과 연습의 장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
공부해둔 게 많이 없으면, 당연히 연습할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다녀온 사람 중에 영어가 엄청 는 사람은 거의 못 봤을 것이다.
하지만, 다녀와서 정말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 워홀이나 6개월 어학연수 다녀와서 영어가 엄청 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호주 가기 전에 아마도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다만, 실전 연습을 많이 함으로써 내재되어 있던 능력이 발현되어 나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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