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편
자주 쓰지도 않던 식기세척기가 몇 번 썼는데 그만 고장이 나버렸다. 그래서 불렀던 전기공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당장 달려오는 법은 없어서 수 일을 기다린 후에야 드디어 우리 집 벨을 눌렀다. 마침 그날은 남편이 무슨 일인지 휴가를 내고 집에 있었는데, 전기공이 왔다는 걸 알고서는 뜻밖에도 나보고 문을 열어주라며 본인은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전기공이 오기 전에 서둘러 청소며 빨래며 다 서둘러 마치고 그제야 막 앉아 조금 쉬려는데 남편은 그렇게 무심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겠다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주고 간단히 인사를 했다. 전기공은 목이 높은 워커화를 신은채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왔다.
도대체가 주인이 집안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데, 굳이 벗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발을 신은 채로 가끔 집안에 들어오는 몰상식이 이해가 안 되었지만 벗어달라고 얘기하지 못하는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예의상 신발을 벗기 위해 운동화 끈을 한참을 걸려 다~ 풀고 들어오는데, 각각 다른 짝의 양말에 엄지에는 큰 구멍이 나있는 경우를 몇 번 본 후로 나는 대부분 괜찮으니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곤, 그 자리를 다시 청소하면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곤 했다.
전기공이 한참을 부엌에서 경험은 많으나 전혀 바쁘지는 않은 움직임으로 식기세척기의 이곳저곳을 보고 있었을 때, 나는 한국에서처럼 그냥 조용히 있기에는 너무 어색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무언가 얘기를 했고, 나도 그 질문에 답을 하고 또 어색한 침묵을 채우기 위해 다시 무언가 가벼운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은 부담 아닌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전문적인 용어야 모르면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는 법인데 그와의 대화가 평소의 어떤 때보다 힘들었던 건 기술직 특유의 슬랭으로 범벅이 된 말과, 덥수룩한 콧수염에 가려 입모양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잔뜩 신경을 곤두세워 들었던 탓인지 그가 떠나고서야 머리가 여태 과부하에 걸렸었던 듯했다.
전기공이 떠나고 난 후에도 마치 아무도 왔다 가지 않은 듯,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여전히 무심히 서재에만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던 남편이 조금은 서운했다. 잠시 후, 물을 마시러 나온 그에게 하소연을 빙자한 질책을 했다. "아, 정말이지 기술직 사람들은 매번 왜 그렇게 슬랭이 많아? 그냥 하면 될 말도 왜 꼭 그렇게 호주 토박이만 알아듣는 말로 해야 하나? 그리고 수염으로 입술을 덮었으면 좀 더 발음을 정확히 해 줘야지, 무슨 로봇에서 녹음된 소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말을 하는데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 번 되물은 말을 계속 모른다고 다시 반복해달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아 정말, 다음부턴 당신이 좀 얘기해 줘. 내 영어는 아직 영 모자란가 봐."
“방금 했던 얘기의 주인공이 키도 180이 넘고 체격도 럭비를 해도 좋을 것 같은 금발의 백인 호주인 남성이었다고 생각해봐. 슬랭도 못 알아들어서 몇 번이나 sorry?를 반복해 물어야 하고, 지난 럭비 게임에 대해서는 별 할 말도 없는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하게 보이겠어? 나도 정말 힘들다고, 그 사람들 말 한 번에 알아듣는 거."
“네가 그럼, 난 뭐 더 알아듣기 쉽냐? 나도 똑같이 힘든데, 아니 더 힘든데 자기 조금 쪽팔린다고 그걸 나한테 다 맡기는 법이 어딨어?”
“그래도 여자들한텐 스포츠 얘기도 안 할 거고, 또 슬랭도 너는 동양인이니까 잘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되잖아. 나처럼 멀쩡하게 럭비선수를 해도 좋을 것 같이 생긴 백인이 스포츠도 잘 모르고, 슬랭도 잘 못 알아들으면 진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어? 이건 조금 쪽팔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지 뭐.”
남편은 어릴 땐 스코틀랜드 부모님 아래서 그쪽 억양이 강한 영어를 썼으며, 5학년이 되면서는 쿵후를 시작하면서 주로 중국계 호주인들과 어울리며 영어도 썼지만 동시에 중국어도 배워 섞어 썼다고 했다. 그리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 한 2년여는 프랑스에서 불어를 하며 살았고, 대학은 다른 나라에서 다녔다. 호주에서 태어나 20년 가까이를 보냈지만, 전형적인 토박이 호주인이라고 하기엔 뭔가 조금 부족했던 그에게도 호주인의 우물거리는 슬랭 범벅의 말은 해독이 쉽지 않은 암호였던 거였다.
그러고 보니 호주에 갓 도착해서, 은행에서 첫 계좌를 개설할 때 그 담당 은행원이 남편에게 했던 말이 여태 잊히지가 않는다.
“어디 출신이에요?”
“시드니요”
“뭐라고요?? 근데 발음이 왜 그래요? (What? What’s up with your accent?)”
종종 미국인으로 오해받을 만큼 남편에게는 호주의 강한 액센트가 없었던 거였다.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호주 말이 정말 어렵다. 너무 안 들린다. 호주인들 발음을 맨날 우물거린다. 호주 영어 힘들다...
자신을 너무 탓하지 마시라~
호주인의 1/3은 호주 슬랭만 쓰고, 1/3은 슬랭과 표준 영어를 함께 쓰고, 나머지 1/3은 표준 영어만 쓰고 알아들을 수 있다고 한다.
호주인 조차도 가끔은 힘들어하는 호주 토박이말.
그걸 못 알아듣는 우리가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오늘부로 스트레스는 이제 그만.
하지만,
영어공부는... 꾸준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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