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척하다 망신

|내 20대의 부끄러운 고백

by 코리아코알라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였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교환 교수로 허친스 교수님이 오셨던 것은.


60을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 교수님이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7살 때인가 9살 때 셰익스피어를 읽었다고 하셨다. 그 당시 나는 셰익스피어 작품 해석에 엄청 애를 먹고 있었으므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너무나 전형적인 상류층 영국식 억양에 미국인 교수들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격조 있는 언어와 매너. 왠지 조금은 생소하고 불편하기도 하면서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신기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의 영어 = 미국 영어였으니, 당연히 나는 영국 발음을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


수업 시간마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영국식 상류층 발음을 알아듣느라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허친스 교수님은 평소에 그룹으로 종종 토론을 시키셨고, 교수님은 그룹별로 돌아가며 토론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셨다. 그날도 무슨 주제였는지는 기억은 안 나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수님이 우리 그룹에 오셨고 열심히 '뭔가'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다. 그렇다, 정말 '뭔가'였다.


나는 그날따라 교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평소 영어 제일 잘하는 우등생으로써 도저히 못 알아듣는다고 말할 수가 없어, 열심히 교수님의 말씀에 맞장구를 치고 '어허 어허 (uh-huh)'하며 흥미로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자니,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얼굴은 상기되기 시작하고, 맥박도 빨라지고... 아, 대체 뭐라고 하는지 한 박자 놓치고 나니 그다음은 당황해서 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어차피 엎질러진 물. 에라 모르겠다, 조원도 많은데 굳이 뭐 나한테 뭐라고 하겠어하고 생각하며 연신 리듬 맞춰가며 "Uh huh, uh huh..."를 좀 남발해댔다.


'어허 어허'를 얼마나 했을까?

갑자기 교수님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갑자기 자신이 방금 뭐라고 했는지 말해보란다!!!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당연히 그 내용을 알지 못했던 나는 연신 '어... 어...' (uh... uh...)만 반복하며, 내 얼굴은 미치도록 맵게 빨간 떡볶이보다 더 빨갛고, 더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교수님께서 너무나도 불같이 화를 내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 왜 아는 척을 하느냐면서.


하지만, 정말 그땐 무식해 보이고 싶지 않았고, 잘하게 보이고 싶어서 몰라도 '어허'만 반복하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던 때였다.


그날의 수치스러웠던 기억은 나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었지만, 더 많이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으며, 내가 한 분야라도 다 알기는 불가능하겠다는 걸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조금은 두렵지 않아졌다.

그래서 요즘 나는, 모른다는 얘기를 부끄럼도 느끼지 않고 종종 잘한다.


내 20대는 아는 척하느라 무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짐으로 매번 조금은 더 유식해지고 있는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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