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슈퍼파워를 잃은 원더우먼

by 코리아코알라

나는 키가 160cm도 되지 않는 작은 키에, 대체로 스포츠는 TV에서 보는 것조차도 싫어하며, 학교에서 피구를 하면 항상 제일 먼저 맞고 나와 그늘에 앉아 쉬던 그런 여자다. 즉, 키도 크지 않고, 달리기도 왕년에 조차 빨라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내게는 "슈퍼파워"가 있다.


나의 그 범상치 않은 능력을 알게 된 건 1990년대 중반쯤이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그다지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음에도 나를 참으로 많이 좋아해 줬던 H가 졸업도 하기 전에 서울에서 직장을 잡았다고 했다. 한 번 놀러 오라기에 망설임 없이 바로 그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약대에 다니던 H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이 있을까, 약국일까 제약회사일까를 고민하면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H와 만나기로 한 곳을 어렵게 찾아가 오랜만에 회동을 하고 어딘가로 열심히 따라 걸어가는데 이곳은 어딘가? 홍대도 아니고, 종로도 아니고, 강남도 아닌 것이... 영 좀 꺼림칙한 동네로 접어드는 거였다. 공장이 아니라 아파트가 있는 동네이긴 했지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떤 간판도 없는 건물을 H를 뒤따라 올라가기 시작하며, 약국이 아니라 소규모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다. 그 "회사"에 들어서자 그 안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들 그룹별로 각 방에 앉아서 뭔가를 토론하고 강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친구는 뭔 일을 하는 걸까? 살짝 긴장도 되고 걱정도 되었지만 오랜 친구를 믿어 의심치 않기로 했다.


도착하여 여전히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얼마 후 각 방의 모든 사람들이 한 군데 홀에 나와 모두 모여 줄을 맞춰 서기 시작한다. 그리곤 갑자기 앞사람의 어깨를 주무르고 안마를 하는 둥 몸풀기 운동 같은 걸 한다. 오랫동안 앉아서 일을 하는 직원들을 위한 이 회사의 특이한 브레이크 타임 같았다. 특이한 휴식시간이 끝나고 여전히 조금은 떨떠름 찝찝해하고 있는데 이제는 드디어 집기도 없이 달랑 테이블만 가운데 있는 사무실에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는 배치? 되었다. 그곳에서 주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조부모님들에 관한 이야기, 그분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며, 무릎 관절이 아프다며 늘 무릎을 주무르시는 할머니와 어머니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곤, 눈물도 찔끔 흘리며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왜 친구의 직장에서 효와 부모님의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까?


그렇게 열심히 얘기를 듣는 동안 나는 친구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볼 수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 순간 나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딘가 숙소로 이동이 "되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불안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고 나는 집에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삐삐는 있어도 핸드폰은 없던 시절이라) 공중전화 근처에는 갈 수도 없었다. 전화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정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8평이 되려나 싶은 작은 아파트에 거실과 방 두 개에 사람들은 다시 각 모임으로 모여 앉았다. 다시 한번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 그분들의 건강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내 생각이나 계획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오자 나는 한쪽 방에 다른 여성 동지? 들과 누웠고, 그들은 나에게 마사지를 해 주겠다며 웃통을 벗으라고 했다. 나는 불같이 화를 내며 무슨 사이비 종단처럼 무슨 짓이냐고, 내 몸에 손만 대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윽박을 질렀다. 정말이지 속으로는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게 뜬눈으로 날이 새고, 다시 그 전날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룹별로 모여서 토론하고, 다시 홀에 모여 서로 마사지해주고, 숙소로 돌아갔다.


저녁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불편한 식사를 마치자 다시 한번 부모님과 조부모님 얘기가 나오고, 이제는 그분들의 그 고통을 어떻게 하면 완화시켜드릴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바로 "OOO전기요"였다. 거금 3백이나 하는 그 마법의 요를 부모님께 선물해 드리라는 거였다. 지금까지 흩어졌던 퍼즐이 맞춰지면서 허무함과 분노가 동시에 밀려왔다. 이거였구나. 말로만 듣던 "다단계"라는 것이. 다단계가 다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그건 정말 사기였다. 그렇게 고액의 돈을 쓰게끔 만드는 악질의 사기단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정말 실제로 내가 당하게 될 줄은 몰랐다.


친구는 서울에 직장이 되었다고 집에 거짓말을 하고는 월세에 보태기 위해 몇 백을 집에서 빌린 것 같았다. 당연히 그 돈으로 다시 그 "마법의 요"를 샀던 거고.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아님 아니)하고 다시 나를 끌어들였던 거고.


그다음 날은 다시 그룹별 토론, 홀에서의 마사지를 하고 모두 지하의 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한잔하는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나의 위치는 문에서는 떨어진 곳이었으며 내 주위를 장정의 남자들이 다 에워싸고 있어서 도저히 감시망을 뚫고 자유롭게 나갈 수는 없었다. 절망스러웠지만, 희망을 도저히 버릴 수도 없었다.


내가 슈퍼파워를 발휘한 건 그 커피숍에서였다. 누가 무슨 말을 했을까? 나는 애써 절박함과 공포를 숨기며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멈추지 않고 의자를 밟고 올라서고, 다시 테이블을 밟고, 다시 다른 테이블로 뛰고, 다시 그다음 테이블로 점프, 그리곤 위로 올라가는 긴 계단을 숨도 쉬지 않고 뛰어올라갔다. 숨이 터질 것 같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내 인생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계속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고, 그 많은 남자들도 정신을 차리고 대처하기까지 적어도 몇 초 이상은 걸렸을 것이었다. 열심히 뛰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들 몇 명이 나를 열심히 뛰어 따라오고 있었다. 정. 말. 무서웠다. 잡히면 죽는다, 뛰어! 무조건 뛰어... 그렇게 뛰던 나는 막 출발하려던 버스를 액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멋있게 순식간에 올라탔다. 버스는 출발했고 나를 따라오던 남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멍하니 서서 쳐다보고 있었다. 버스는 달리고 있었지만 나의 불안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버스보다 지름길을 알아서 나를 다시 찾아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버스가 그 미친 소굴로부터 조금씩 더 멀어져 감에 따라 나도 서서히 안도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인 90년대에 겪은 일이지만 아직도 그 상황을 떠올리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서스펜스가 느껴진다. 나는 대체 무슨 힘과 배짱으로 그런 탈출을 감행한 걸까? 상황의 절박함과 그 상황을 벗어나고픈 절실함, 나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믿음이었겠지...


살다 보면 종종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맞을까, 내가 해낼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나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작도 하기 전에 접어 버리거나, 하던 중에도 더 이상 펼쳐보지 못할 것 같은 적도 많다. 그런 날이면 나는 20대의 나의 슈퍼파워를 기억하려고 한다. 아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떠오르곤 한다. 내게 그런 슈퍼파워가 잠자고 있다는 걸 내 잠재의식이 내게 상기시켜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슈퍼파워는 내 안에 고요히 있을 뿐이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전히 나는 엄청난 초능력의 원더우먼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슈퍼파워는 언제 어떻게 발견하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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