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한국에 초등학교 2학년 때 왔다. 호주에서 태어나 그전까지 살다 한국에 왔지만, 늘 나와는 호주 집에서 한국어를 썼고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한국에도 자주 왔다 갔다 해서 그랬던지 (혼혈인) 자신이 대부분의 한국인처럼 안 보인다는 걸, 자신이 한국인이 아니게 생각될 수도 있는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아들은 다르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고 한국에 떨어진 순간부터 정말! 열심히 동화하려 노력했다. 초등 고학년이 될 때까지. 하지만... 서서히...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늘 "저 외국인...", "내 호주인 친구...", "외국 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그냥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부터는 한국에 동화되기를, 한국인이 되기를 멈추었다.
형이 한국 중학교에서 너무 힘들어하는 걸 본 남편과 나는 둘째는 중학교를 처음부터 아예 국제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실은 거기도 이름만 국제학교, 외국인 학교일 뿐 90프로 이상이 다 한국인이었다. 둘째는 거기서도 튀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또다시 그렇게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는 더더욱 정체성의 혼란으로 힘들어했으며, 학교가 여러 이유로 자신과 맞지 않아 매일매일 학교 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아침 일찍 스쿨버스를 타야 했는데 내가 아침 6시에 매일 깨우는 게 날이 가고 또 가도 쉬워지지가 않았다. 혹자는 그냥 두면 지각을 할 거고,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 알아서 일어나서 갈 거라고 했지만, 아이는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았고, 별로 결석하는 것에 대해서 개의치 않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와 얘기를 하다가 불쑥 아이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아, 그리고 이때쯤에는 이젠 동화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자신은 한국인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 호주로 돌아가 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니 당연히 영어로만 말했다. 둘째는 한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했음에도 중학교 때부턴 줄곧 영어로만 말했다. 내가 아무리 항상 한국어를 써도, 아무리 한국어로 답하라고 해도 꿋꿋하게 한결같이 영어로만 답했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반말인 듯 아닌듯한 영어의 'YOU'가 너무 듣기 싫었다. 지금보다 더더욱 꼰대 같던 시절이었다. 학교가 다니기 힘들다는 얘기를 하던 중에 둘째는 "You will never let me drop out of school anyway! (엄마/너는 어차피 제/내가 학교를 중퇴하게 허락해주지도 않을 거잖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런 말을 맹세코 한 적이 없었으며 그런 생각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둘째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그만두는 건 안되고, 학교를 그만두고 뭘 하겠다는 계획이 있으면 언제든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묻기를 왜 내가 단 한 번도 학교를 그만두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반대할 거라 생각했느냐고 물었다. 그때 아이의 대답이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했고, 조금은 더 변화하게 만들었다. 자신도 실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니 잘 모르겠지만 왠지 나는 자퇴를 못하게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늘 강하게 받았다고 했다. 간단히 말해 그냥 나라는 사람이 아주 원칙적이고, 불편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얼마 뒤 열심히 고민하고 정보 수집을 한 아들이 컴퓨터 보안 쪽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하버드에서 하는 온라인 과정과 다른 몇 군데에서 하는 과정들을 순차적으로 모두 수료한 후 호주로 가서 취직을 하겠다고 했다. 그 계획을 듣고 바로 그다음 날, 나는 아이 학교에 가서 자퇴를 신청했다.
그 후, 아이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듯 아주 많은 자격증과 과정을 들었다. 물론, (3당 4락의 시대에 살았던) 내가 보기에는 설렁설렁하는 것 같아 내심 좀 못마땅했지만 자격증의 목록은 점점 길어져만 갔다.
한편, 이미 일 년 전 호주 대학에 가 있던 형은 코로나로 집 밖에도 못 나가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맛있는 밥을 해 먹을 수도 없고,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매일매일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둘째는 고3 나이가 될 때까지는 한국에 있다 호주로 갈 계획이었지만,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던 형이 걱정이 되어 몇 달간 휴가가 가능했던 아빠와 함께 급하게 호주로 떠났다. 그때 둘째는 만 16 하고 3/4세 정도 되었다. 형과 지내면서 계속 공부도 좀 더 하고, 호주의 전자랜드 같은 곳에서 알바도 하면서 사회생활도 좀 하려고 한다 했다.
그러다 우연히 창업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급성장을 하던 중소 IT기업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지원해 보는 것도 경험일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합격할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은 채.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는 아이치고는 꼼꼼한 모의 인터뷰를 엄청나게 연습을 했다. 어쩌면 아이는 실은 기대가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이는 (당연한 결과인지) 덜컥 합격을 했다.
그곳에서 했던 주 업무는 기업들에 깔린 소프트웨어나 컴퓨터 상의 문제 해결, 소프트웨어 깔아주기, 컴퓨터 조립하기 등 가장 낮은 레벨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인정을 받아서 반년쯤 지난 후에는 그곳에 갓 생긴 보안 부서로 스카우트? 되었다. 하지만 가장 낮은 레벨에서 시작했으니 아무리 월급이 오르고, 성과급을 받고 해도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월급이 훨씬 더 낮았던 것은 여전히 큰 의욕상실 요인이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같은 일을 하면서 몇 십만 원씩 월급이 조금씩 인상되는 걸 원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이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들은 첫 직장에서 1년이 조금 넘게 일한 후 호주에서 IT로 가장 큰 대기업에 이력서를 넣게 되었다. 아들이 그 회사를 호주의 구글이라고 했다. 그리고 18살 생일 선물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둘째는 이제 그곳에서 일한 지 갓 일 년이 넘었다. 처음 직장보다 월급이 2배 정도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은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이상이었다) 자신보다 모두 연봉이 높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아이는 다시 서둘러 다음 단계로 점프할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떠나야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제대로 된 돈을 벌고 인정을 받아야겠다고. 그렇게 3년 뒤에는 미국에 가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일을 했다.
여전히 올해의 우수 직원상 같은 것도 받고, 수시로 상사에게 칭찬을 받아가면서 참 열심히 했다. 1년 여 동안. 그리고 또다시 19살이 된 지 한 달쯤 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상사는 아이의 다음 달 승진을 비공식적으로 누설한다. (항상 술이 문제다) 내년 둘째의 연봉은 다시 엄청나게 뛸 것이다. 한국에선 대한항공 파일럿쯤 되어야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연봉이다.
사실 나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시키는 과정을 따라 무난하게 졸업을 하고, 대학을 가서 공부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학교 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건너뛰고, 캠퍼스를 거닐어 보지도 못하고, 같은 또래들과 어울려보지 못하고, 물질적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가득 차 있어도 괜찮은 걸까... 참 나는 걱정이 되었다. 사람들이 "좋겠다", "걱정할 거 없겠다", "자랑스럽겠다"는 말을 했어도 나는 실은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너무 욕심을 내어 마음을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했다. 인생이란 잘 나가기도 하지만 마음대로 안 풀리기도 하는데 너무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는 건 아닌가 하고. 그런데 이젠 마음이 놓인다. 최근에는 지금 일하는 곳에 사람들이 너무 좋다고, 그곳에 좀 더 오래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자신보다 더 빨리 학교를 그만두고 비슷한 길을 걸어온 동료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약간 힘을 빼고 삶을 즐기기 시작한 것 같아서.. 물질이 다가 아닌 것처럼 느끼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제서야 마음이 놓인다.
나는 이제 내 앞가름이나 잘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