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의 나일 수 있게 해 준 시간
Henry, 헨리... 나에겐 참 의미로운 이름이다.
어쩜,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이름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의 중반쯤 어느 비 오던 날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다 불현듯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이렇게 계속 내 인생을 살고 싶진 않다.'
그때까지 나는 스웨덴이 본사인 큰 학원에서 유명 강사로 일하다,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대기업에서 강의도 하며 돈도 제법 잘 벌고 있었다. 뭐 그닥 자랑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별로 불만일 만한 것도 없는, 남들이 보기엔 잘 나가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늘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는걸. 내가 소원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걸. 단지 대학 등록금과 용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걸.
그날 오후 나는 학원에 사표를 냈다. 사표 처리는 되지 않았고 무기한 휴가로 처리되었다.
그렇게 나는 계획에 없던 2년여에 가까운 배낭여행을 떠났다. 나를 찾기 위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1년쯤 지난 어느 한 겨울, 캐나다에 도착 후 유독 추웠던 어느 날은 무조건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렇게 간단히 가게 되었다, 뉴질랜드로. 물론, 그곳에서 사과도 따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여행자들의 말도 내 결정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긴 했다.
거기서 내겐 사과를 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나는 열심히 한동안 파프리카만 땄다. 하지만 그것도 소질이 없어 주인에게 눈치만 받다 결국 그만두고 오클랜드의 '$2 Shop', 한국으로 치면 '다이소' 정도 되는 가게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첨엔 물건 쌓는 일을 하다, 프런트도 보다, 가끔은 도둑넘들을 지키는 일들을 하기도 했는데 생각할수록 너무 안 어울리는 일이었다.
거구의 뉴질랜드 사람들을 이 작은 체구의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서서 보고 있었으니!! 하하! 아마 그래서 누구도 내가 거기서 도둑을 지키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까?
그날도 가게 앞에 떡하니 서서 도둑넘이 있나 없나 누가 뭐 훔치나 지키고 서 있는데 여느 때처럼 헨리가 왔다. 옆 가게 앞에 낡아빠진 박스를 놓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인지 소음인지 모를... 나이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지적 수준은 일반인의 보통에도 미치지 못해 보였으며,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고, 사람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고,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 몰골은 꼭 홈리스의 그것과 같았으나 알 수 없는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늘 헨리를 봤지만 한 번도 내가 그와 말을 한 적도,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가끔 출출하면 그가 서 있던 곳 앞 가게에서 도넛과 콜라 한 캔을 사 먹는 그의 모습을 봤을 뿐.
그렇게 헨리가 노래를 부른지 얼마 되지 않아, 어딘가서 십 대 몇 명이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동전이 몇 개 담겨있던 '헨리의 박스'를 들고 튀는 게 아닌가? 헨리는 아기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놈들을 쫓아갔다. 실은 그런 시늉만 했다, 내가 뉴질랜드의 십 대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곤 다시 헨리에게 다가가 그놈들 욕을 마구마구 하곤 나도 모르게 헨리를 안아 주었다. 그리곤 엄마가 우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토닥... 내 안에 알 수 없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감정이 일어났다. 눈물도 흘렀다. 그건 헨리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흘리는 눈물이었다. 내게 냄새나고 더러운 홈리스를 안을 수 있는 가슴이 생겼다는 것. 나는 이제 나를 찾은 것 같았다. 이제 여행을 그만해도 될 것 같았다...
앞 집에서 헨리가 좋아하는 도넛 한 봉지와 콜라 한 캔을 사서 헨리에게 줬다. 헨리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듯, 넘 맛있게 먹었다, 옆에 내가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아직도 나는 가끔 그때가 생각이 나는데 모든 기억이 무성 칼라 영화처럼 지나간다. 그렇게 나는 20대의 오만과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 후 얼마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삶이 편하면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자꾸 든다. 그때마다 나는 헨리를 떠올리며 그때의 나를 기억하려 한다... 헨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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