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번째 십대
20대의 나는 '관광비자'로 맘 가는 곳에 가서 맘 닿음이 다할 때까지 머물곤 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90년대 중.후반만 해도 뉴질랜드에서 관광비자는 1번 연장할 때도 잔고가 충분해야 했고, 체류 목적도 뚜렷해야 하는 등 그다지 쉽지는 않았는데 나는 다행히도 첫 연장은 별일 없이 잘 받을 수 있었다.
배낭여행 중 꽤 오래 머물게 되었던 뉴질랜드에서 나는 '$2 Shop'이란 다이소와 같은 가게에서 제법 돈 버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다른 어느 농장이나 식당에서 일하거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더 수입이 짭짤해 여행경비를 충분히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덧 6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조금만 더 연장을 하고 싶었는데 아뿔싸 내가 너무 쉽게 생각을 했었나 보았다. 모든 준비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민성에 인터뷰를 하러 가니 엄청난 거구의 무섭게 생긴 마오리 아줌마가 떡! 하니 내 앞에 버티고 앉아있는 게 아닌가? 그거까지도 좋았는데 문제는 그 아줌마가 입을 열고 질문을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내가 보기엔 네가 순수 관광객 (genuine tourist) 같이 안 보이는데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그러니 네가 순수 관광객이란 걸 나에게 증명해봐 줘야겠어. 어떻게 증명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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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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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칠흑같이 되었다를 반복하다, 결국 나는 다른 아무 말도 못했다.
마오리 아줌마는 내게 일주일을 줄 테니 그곳을 떠나라고 했다.
나는 알겠노라고, 곧 출국 준비해 이 나라를 떠나겠노라고 얘기하고 나왔다.
그 마오리 아줌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겠지만,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이 분명함에도 왠지 억울하고 속이 상했다.
그리고 며칠 간 이것저것 정리를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반 년을 보냈던 뉴질랜드라는 아름다운 나라를 추억의 나라로 만들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한 찰나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더 악화될 수 있는 상황은 없어. 까짓 거 잃을 것도 더 없는데 한 번 더 부딪혀보자.'
그리곤, 바로 그 담날 나는 다시 이민성으로 향했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며칠 전의 그 마오리 아줌마가 또 안 나오기를 속으로 얼마나 빌고 또 빌었는지, 혹시라도 나를 보고, '내가 이곳을 떠나라고 했을 텐데, 여긴 또 왜 왔어?' 한 마디라도 하면 그냥 도망이라도 치고 싶을 것 같았다.
심장이 터지도록 떨렸음에도 애써, 너무나도 간신히 태연한 척 앉아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자, 하늘이 나를 도우셨을까, 자그마한 착하디 착하고 순하디 순해 보이는 백인 아줌마가 나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인터뷰는 며칠 전과 거의 같은 질문으로 시작되었고, 나는 '네가 순수 관광객이란 걸 증명해봐!' (Prove to me that you are a genuine tourist.) 이 말 한 마디를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일반적인 공식 질문들 중의 하나였던가 보았다. 역시나, 이 아줌마도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자신있게 내가 준비해 온 대답을 했다.
"글쎄요, 전 순수 관광객이 맞는데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그쪽이니까, 오히려 당신이 내가 순수 관광객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요?!"
그 순간, 그 백인 아줌마의 표정은 며칠 전 내 얼굴에서 이미 본 그것과 흡사했다.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지려는 순간, 이 아줌마가 갑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난 여전히 만족스러운 행복감에 젖어있는데, 빼꼼히 사무실 밖으로 내비치는 얼굴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며칠 전의 그... 마오리 아줌마!!!!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하며 얼굴은 '빨강의 최상급'이 있다면 그런 정도였을 색조를 띄며 불안 불안하게 앉아있었다.
하아안~차아암~ 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 백인 아줌마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아, 이건 다 글렀구나. 왜 이렇게 일이 꼬이냐? 거의 다 된 거였는데...' 이런 등의 생각 중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백인 아줌마가 뭐라고 할지 뻔히 다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는 (이 순간 그 아줌마는 아름다운 그녀!로 변신했다.) 나에게 '그렇담 한 번 더 비자를 연장해 주지. 그런데, (씨익~ 웃으며) 너, 순수 관광객 맞는 거지? (그리곤, 알 수 없는 미소)'라고 했다.
순간 나는 뭐라고 해야 하나??... 분명 그 마오리 아줌마가 내가 며칠 전 자기한테 퇴짜 맞고 오늘 또 왔다는 걸 얘기했을 거고, 이 '그녀'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묻는 이유가 뭘까???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나는 아까의 자신감과 패기는 다 어디로 가 버리고 그냥 어정쩡한 '네~'만 모기만 한 소리로 기어들어가듯 대답했다. 그리곤, 조금이라도 잘못될라치면 뛰어나가기라도 할 태세를 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그녀!'는 내 여권에 비자 연장 도장을 찍어주었다!!!
아마도, 내 용감 무식한 패기와 용기를 가상히 여겨서였으리라.
내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은 했는지, 꺄악~ 소리를 질렀는지, 격한 포옹을 했는지 그 순간의 기억은 없다.
어쩜 세 개 다 하지는 않았을까? 하하.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확실하게 배운 교훈이 있었다:
'끝이라고 생각될 때라도 반드시 한 번 더! 부딪혀 봐야만 진짜 끝을 알 수 있다.'
이건 내가 요즘 네 번째 십 대에 들어서 짭짤하게 재미를 보고 있는 나의 명제이기도 하다.
이 나이가 되어 맨땅에 헤딩하는 건 힘들면서도 때론 자존심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매번 세상의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을 때, 아무도 눈길도 주지 않을 때, 나는 이 명제를 되씹으며 실천한다. 그러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누군가는 나에게 찰나의 눈빛이라도 주곤 한다. 딱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만 전해주며.
그러면서 매번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 누가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했나?
기회가 내게 오지 않는 것은
단지 내가 여기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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