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식구들은 언제나 다 같이 둘러앉아 주말 저녁에 방송되는 가족 드라마를 봤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이랑 같이 봐도 되나 싶은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엔 무심했던 시절이었다. 가끔 티비 속에서 우리 부엌에 있는 그릇이랑 같은 걸 찾아내기도 했었고, 어쩔 땐 브라운관 속에 등장하는 2층집을 한없이 부러워하기도 했다. 어른들과 같이 드라마를 보는 게 버릇이 되어서 다 커서도 드라마 보는 취향은 조금 구식이다. 늘 예전 드라마가 더 재밌다고 생각하니 말이다.
거실 가운데 널따란 나무탁상이 놓여 있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함께 사는 대가족 식구들이 모여 앉아 밥을 먹기도 하고 과일을 먹기도 한다. 대가족들 밥 차리고 치우느라 고단한 엄마나 며느리의 고단함을 잘 모르고 밥상 위에 무슨 반찬이 올라와 있나 궁금해서 살펴보느라 내용을 놓치기도 했다. 안방은 꼭 미닫이 문으로 되어 있어서 드르륵 열고 엄마, 하고 부르는 그런 장면들을 특히 좋아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드라마 속 인물들의 그런 집에서 복닥거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는 '엄마가 뿔났다'라는 KBS에서 방영했던 주말연속극이다. 관록의 배우들이 어느 한 구석 모자라지 않게 연기를 해내기 때문에 언제 봐도 어색하지 않을뿐더러 극 자체의 재미도 훌륭하다. 하지만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김혜자 님이 연기한 '김한자'라는 엄마 때문이다. 주인공 '한자'는 고만고만한 살림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착하고 속 깊은 어머니이자 가족들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옛날 세대의 어른이지만, 한 편으로는 여전히 스스로를 알아가고 싶고 한 개인으로 나를 찾아가고 싶은 독립적인 여성이기도 하다. 온 가족들은 ‘한자’만을 바라보지만 그러기에 그녀는 다소 생각이 많고 예민하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맡은 역할을 해내려고 하지만 언제나 무리해야 한다.
자식들과의 푸닥거리와 친구이자 시누이, 남편, 시아버지에 대한 크고 작은 섭섭함이 쌓이고 쌓여 한자는 결국 집을 나가고 싶다는 선언을 한다. 휴가를 가겠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엄마이자 아내이면서 며느리인 ‘한자’를 보며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완고하게 반대한다. 오직 ‘한자’를 아끼는 시아버지만이 그러라며 순순히 찬성한다.
어떻게 엄마가 저럴까. 왜 저렇게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일까.
처음에 이 드라마를 시청할 땐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가 ‘한자’의 딸이 된 것 마냥 서운한 마음이 덜컥 들었었다. 그냥 용서해 주면 될 텐데 너무 성질을 부린다는 생각도 했었다. 당시 방영되던 시절엔 그건 정말 파격적인 요구였고 내 기억으론 방송이 나가고 나서 이런저런 기사도 났었다.
그러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다시 드라마를 보게 되었을 땐 처음보다 더 크게 놀랐다.
일단 '한자'의 요구가 더 이상 전처럼 큰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또 드라마 속 '한자'는 어쩜 우리 엄마와 꼭 닮았을까 하는 거였다.
사실 우리 엄마의 외모가 김혜자 님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이 그 드라마를 시청한 이유이기도 했는데, 다시 봤을 땐 외모보다는 엄마의 기질이 '한자'와 꼭 닮아있다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두 사람 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 늘 헌신해야 하는 삶이 버거울 때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안 것이다. 드라마 속 자식들이 속을 다치게 하고 엄마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다친 마음을 안고 돌아서는 '한자'의 얼굴은 왜 그렇게도 익숙한지. 지치고 지쳐 힘없이 한숨 쉬는 '한자'의 얼굴에서 엄마가 겹치는 순간은 또 어찌나 많은지. 우리 엄마도 한자처럼 자식들을 사랑하는 성실한 엄마지만, 인생의 모든 순간을 엄마의 역할에 매몰되고 싶어 하지 않는 개인이다. 우리 엄만 집을 나가고 싶을 때가 없었을까. '한자'가 울 땐 나도 같이 울었다.
맞벌이가 흔하지 않다 못해 없던 시절에 엄마는 꿋꿋하게 일을 했었다. 그래서 나는 반에서 유일하게 열쇠를 목걸이처럼 달고 다니던 아이였다. 엄마는 다른 엄마랑 비교하면 어딘가 다른 사람이었다.
"엄마는 정말 엄마 맞아?!"
내가 크면서 엄마한테 제일 자주 했던 짜증이다. 그러면 엄마는 다리에서 주워왔다고 받아쳤지만 어린 자식이 그런 투정을 부리는데도 출근해야 하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입 떡 벌어질 만큼 맛있는 간식을 얻어먹거나, 학교를 마치고 나왔는데 누구누구네 엄마가 마중을 나와있다던지 하는 날이면 나는 자주 울컥했고 엄마가 일하는 곳에 전화를 걸어서 막 짜증을 피웠다. 나는 온몸으로 우리 엄마는 조금 튄다는 걸 느끼며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팍팍 냈었다. 엄마보다 이모를 훨씬 따랐다. 그땐 엄마의 세계가 더 넓고 깊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자식이 속을 다 헤집고 못나게 굴 때 화를 내고 다그치다가 지친 '한자'는 부엌에서 조용히 독백을 한다. 그 독백을 듣고 있으면, 차라리 이모네 집 가서 살고 싶다고 떼를 부리던 나를 달래고 혼내키다가 이내 삭히며 마음을 다스렸을 엄마의 기분이 헤아려진다. 나도 어른이 되어서 엄마와 비슷한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났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감정들을 다스리며 살아가자니, 한자도 엄마도 얼마나 속 상했을까 서글프기까지 하다.
평범하면서 어딘가 독특한 엄마. 신경질도 다 부리고 짜증도 피는 다정한 엄마. 지나치게 신파적이거나 불행하지도 않으며, 너무 일차원적이지도 유치하지도 않은 엄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늘 기분은 평안한 지 궁금하게 만드는 엄마. 드라마 속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꼭 우리 엄마 같은 그런 엄마. 결국엔 엄마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그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게 해주는 ‘한자’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 속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엄마가 뿔났다 ‘ 는 엄마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중에 어느 것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대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원대로 휴가를 받아 자취방으로 떠나는 '한자'의 그 환한 미소를 보며 나는 언제나 우리 엄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두 여자의 행복과 평안을 내내 바란다. 좋은 드라마는 이야기의 재미뿐만 아니라 이렇게 개인적 삶에도 잔잔한 물결처럼 스며든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쓴 드라마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