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2021. 3. 2. 육아일기

by 이정원

3월 2일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아내의 복직과 함께 나의 육아휴직이 시작되었다.

1년 만의 복직, 학기 초에 대한 부담과 어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춘천도 예외는 아니었던) 봄눈의 여파로 아내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고 해솔이와의 설레는 휴직의 그 첫 장을 함께 열었다.

아침 내내 서재에서 잠시 치워두었던 그림책들을 다 끄집어내어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 여유 있게 책장을 넘기던 아이는 아내가 출근하기가 무섭게 함께 놀아달라며 거실로 나왔다. 아이와 함께 이것저것 몸을 활용하여 역동적인 놀이를 했더니 금세 시간이 흘러갔고, 아이는 9시 30분쯤 첫 번째 낮잠에 빠져들었다. 평소 같으면 낮잠을 자지 않겠다고 있는 힘없는 힘 다 끌어모아 떼를 쓰던 아이도 오늘은 순순히 아기띠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첫 번째 낮잠 치고 비교적 긴 잠을 잔 후 일어난 아이는 자기가 꿈나라 여행을 하는 동안 거실에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던 동생 같은 인형들(토끼, 판다, 곰, 강아지 등)을 차례로 쓰다듬어 주더니 요즘 즐겨 읽곤 하는 그림책 '빨리 일어나세요'를 꺼내 들고 한 장, 한 장 그려진 그림을 유심히 살피며 책장을 넘겼다. 어느 정도 책장을 넘겼을까 책의 페이지 양쪽을 가득 채운 산딸기 그림을 보더니 아빠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손으로 냉장고를 가리키고 '이거'라고 이야기했다. 냉장고 속에 고이 모셔져 있는 딸기를 냉큼 대령하라는 명령이다. 벌써 오늘 아침에도 두 개나 먹은 큰 딸기를 고사리 손으로 과즙이 줄줄 흐를 정도로 꼭 쥐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달달한 과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어쩌나 하는 걱정보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과 뿌듯함, 애정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라 입가의 미소로 바뀌었다.

아이의 아침으로 어젯밤 아내가 만들어 둔 완두콩 감자 닭고기 수프를 먹였기에 늘 아침으로 먹던 오트밀(딸기와 바나나를 함께 섞은 것)을 점심으로 먹였다. 이제는 제법 숟가락을 능숙하게 사용해 전보다 흘리는 음식이 적지만, 오늘은 유달리 흘리거나 남기는 음식 없이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다. 아빠가 만든 음식을 남김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이 그저 예쁘고 귀여웠는데 맛있게 먹은 점심 식사가 남은 오후 아이가 잠투정의 여왕으로 변신하게 할 줄 누가 알았으랴.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는데 양이 너무나 적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밖에 잔뜩 쌓인 눈 때문에 평소와 같이 산책을 하지 못했지만, 아이와 함께 미끄럼틀도 타고 술래잡기(?) 놀이도 하면서 밖에서 보내는 것 못지않게 활발한 신체 활동을 했다. 오늘에서야 미끄럼틀을 정석 자세로 타고 내려온 아이, 스스로도 대견스러웠는지 첫 번째 성공 이후로 약 스무 번이나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 스르륵 타고 내려오기를 반복하던 아이의 모습을 보며 뿌듯했던 것도 잠시, 아이의 표정에 비치는 졸림의 신호를 보고 오늘의 두 번째 낮잠 재우기를 시도했다. 시계를 보니 두시 반, 딱 아이 낮잠을 재우기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두 번째 낮잠 재우기는 난항에 난항을 거듭하다 결국 실패로 끝났다. 아이를 업어보기도 하고, 아기띠를 하고 안아보기도 하고, 함께 범퍼 침대에 누워서 노래도 불러주고 토닥토닥해주기도 했지만 아이는 생떼를 쓰며 잠자기를 거부했다.

잠자기만 거부한 게 아니라 끊임없이 '까까'를 달라는 통에, 물 말고 '우유'를 달라는 통에 여유 있게 앉아서 쉴 틈도 없었다. 단지 몇 시간 사이에 아이의 기분이 이렇게 하늘과 땅을 오갈 수가 있는지… 아침만 해도 얼굴에 익살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연신 '아빠'를 불러대던 아이가 왜 갑자기 잠투정의 여왕이 되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답답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두 번째 낮잠 재우기는 포기했고, 아내가 올 때까지 아이의 투정을 묵묵하게 들어주며 기분이 풀릴 때까지 까까를 대령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오늘 아이가 먹은 점심이 많이 부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점심으로 비빔면을 끓여먹은 나도 허기가 올라와 심기가 불편했으니 말이다(절대 잠투정 공주 때문이 아니다).

아이와 함께 보낸 즐겁지만 조금은 힘들었던 휴직 첫 번째 날은 아내가 퇴근길에 사 온 고기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이를 위한 특별식으로 아내가 준비한 부채살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던 아이의 보니 점심이 많이 부실하긴 부실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자고 난 후 아내와 삼겹살을 구워 얼마 전 새롭게 단장한 베란다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며 각자 낯선 일상에 혼란스러워하며 힘들었을 서로를 위로했다.

막연하게 휴직을 한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오늘 남들 다 출근하는 날 집에서 아이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하루 종일 나를 찾는 이, 이것저것 할 일이 가득한 메시지가 없이 휴대폰이 잠잠한 것을 보니 정말 휴직자의 신분이라는 것이 피부에 와닿는 것 같다. 설렘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육아휴직의 첫날, 아직 가야 할 길은 머나먼 첩첩산중이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육아의 위기를 슬기롭게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적인 생각도 든다. 내일은 또 어떤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만, 아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전과 달리 성장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감동받을 수 있다는 점은 휴직을 하는 아빠가 누릴 수 있는 크나큰 특권이 아닐까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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