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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원 Apr 16. 2023

파리지옥

우리 집에 파리지옥이 이사 왔어요

오늘 우리 집에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파리지옥.


파리지옥이 오늘 우리 식구가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우중충했던 일요일 오랜만에 찾은 강원도립화목원. 화사하게 핀 튤립 구경도 하고, 산책로에 핀 예쁜 꽃나무 구경을 실컷 하고 나오는 길 입구에 위치한 매점에 갖가지 화분들을 팔던 것이 기억나 잠깐 들르기로 했다. 지난번 학교 도서관에서 폐기처분하는 도서 중 '내 이름은 파리지옥'이라는 그림책을 한 권 집에 들였는데, 그 이후로 파리지옥 이야기를 읽어줄 때마다 깔깔 웃으며 또 읽어달라 조르던 딸내미의 모습이 떠올라 파리지옥이 있으면 사 주겠노라고 이야기하고 잠깐 매점으로 향했다.


파리지옥에 눈을 뜨게 한 그림책 '내 이름은 파리지옥'


매점 밖에는 형형색색의 화분들이 자리 잡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예쁜 꽃들이 핀 화분들,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다육 화분들, 뾰족뾰족 가시복과 비슷한 바늘을 잔뜩 자랑하는 선인장까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밖에 진열되어 있는 화분들을 살폈지만, 파리지옥은 그곳에 없었다.


아이에게 파리지옥을 사 주겠다며 큰 소리는 쳤고, 그대로 돌아가기엔 아이의 실망과 아빠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는 점 등등 후폭풍이 너무나 크기에 혹시나 춘천 시내에서 파는 곳이라도 알고 계시는지 사장님께 여쭤볼 생각으로 가게 출입문을 열었는데 출입문을 열자마자 눈에 부레옥잠이 들어왔다. 부레옥잠을 파는 곳이라면 어딘가에 내가 찾는 녀석이 있을 법도 한데 하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거짓말처럼 벌레잡이 식물들이 진열되어 있는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그 가장 오른쪽에 나와 딸내미가 애타게 찾던 파리지옥들이 잔뜩 모여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마치 '나 좀 데려가세요'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그림책에서만 보던 파리지옥을 실제로 본 딸내미는 신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골라보랬더니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것이 많아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이 귀여웠다. 건강하게 잘 자랄 녀석을 골라야 딸내미 마음에 상처를 안 줄 것 같다는 생각에 사장님의 도움을 받아 후보 몇 개를 추려내고, 그중에서 딸내미 마음에 쏙 드는 녀석 하나를 골랐다. 고사리 손으로 파리지옥을 쥐고 밝은 모습으로 차로 향하는 딸내미의 모습이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


파리지옥아 이제 언니랑 우리 집에 가자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든 낮잠이 쭉 이어지길 바랐건만. 딸내미의 민감한 등센서는 거짓말처럼 작동하여 품에 안긴 딸내미를 침대에 내려놓는 순간 눈을 뜨고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 손에 쥐고 온 파리지옥을 찾았다. 오전의 산책에 녹다운이 된 나와 아내는 그 자리에서 스스르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파리지옥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거실에서 아빠를 찾는 소리에 눈을 비비고 나와봤더니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분명히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파리지옥은 거실 소파 앞에 있는 땅콩책상 위로 옮겨져 있었고, 파리지옥 주위에는 우리 집에 있는 그림책 중 파리지옥이 나오는 책이란 책은 모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소파 뒤로는 견고하게 쌓인 나무블록이 자태를 뽐내고, 딸내미는 그 옆에서 알록달록한 장난감을 높이높이 끼우며 쌓고 있었다.


딸내기가 손수 지은 파리지옥의 집


파리지옥이 심심할 틈이 없도록 마련한 파리지옥 놀이터


"해솔아 안 잤어?"


"응"


"거실에서 뭐 했어?"


"파리지옥 책 읽어주고, 집도 만들어 줬어. 지금은 파리지옥 놀이터 만들고 있어."


엄마 아빠가 세상모르고 잠든 사이 딸내미는 새롭게 식구가 된 파리지옥에게 우리 집에 있는 친구들 소개도 시켜주고, 그림책도 읽어주고, 파리지옥이 지낼 집과 파리지옥이 심심하지 않도록 놀이터까지 만들어주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딸내미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평소 글밥이 읽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면 그저 당황하기 일쑤인 '내 친구는 파리지옥'을 두 번이나 읽어줬다. 딸내미가 손수 준비한 성대한 환영식을 마치고 파리지옥은 진정한 우리 식구가 되었다.


딸내미가 신나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꿈나라 여행을 떠난 시간. 그림책 속에서만 보던 파리지옥을 실제로 만나 잔뜩 신이 난 딸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림책에서 보던 상어와 가오리를 아쿠아리움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기린, 사자, 호랑이를 동물원에서 처음 보았을 때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던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의 딸아이의 모습이 잠깐 머릿속을 스쳤다. 책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 머리로는 잘 알지만 일에 지치고 육아에 지쳐 아이에게 생생한 경험의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지 못했던 모습을 작은 파리지옥이 우리 식구가 된 일을 계기로 반성하게 된다.



우리 집 터줏대감들과 함께 한컷


새롭게 우리 식구가 된 것을 환영해 파리지옥아


새로이 식구가 된 파리지옥이 오래오래 우리 집에서 건강하게 자라며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추억거리,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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