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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차가운 시스템, 따뜻한 마음을 엮다

— 관계속의 비움과 채움 —

by 제이욥

김수현 씨의 삶은 언제나 냉철한 분석과 최적화된 조직도 속에 있었다. 그는 서울 최고의 대기업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HR(인적 자원) 전략가였다. 그의 손을 거친 인적 자원 관리 시스템과 인재 배치 프로젝트들은 늘 경이로운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을 기록했고, 그의 이름은 '조직의 마법사'로 불렸다. 그는 사람들의 감성이나 갈등보다는, 오직 숫자로 증명되는 성과와 시스템적 효율에 주력했다.


그에게 조직이란 '데이터로 움직이는 유기체'이자 '최적의 생산을 위한 장치'였다. 직원들의 주관적인 의견이나 비효율적인 감정 마찰은 그에게 '제거해야 할 노이즈'일 뿐이었다. 고도로 계산된 인력 배치, 완벽하게 정제된 역량 평가 수치, 그리고 AI가 도출한 최적의 인사 솔루션…


이 모든 것이 '가장 합리적인 인적 자원 관리'를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그의 모토는 "사람은 숫자로 평가되고, 시스템으로 관리되어야 한다"였다.


“현재 이 부서의 팀원 간 갈등 지수는 15%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각 팀원의 성과 데이터와 성격 유형을 분석한 결과, 팀장 교체 및 A씨의 다른 부서로의 이동이 조직 생산성을 12% 상승시킬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는 회의에서 늘 단호하고 자신감 넘쳤다. 그의 과학적인 HR 방식 덕분에, 그가 담당하는 프로젝트는 늘 경이로운 성공을 거두었다. 전 세계 유명 경영 컨설팅 기업들은 그의 리포트에 주목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HR 테크의 선구자', '조직 효율성의 지배자'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늘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존재했다. 아무리 완벽하게 예측된 인력 배치와 엄청난 효율성 향상을 보아도, 그는 진정한 만족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고도로 계산된 로직, 완벽하게 조율된 시스템…


그것은 완벽했지만, 어딘가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어릴 적, 고모의 도서관에서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이야기 속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에 공감하던 소박한 기쁨은 이미 오래전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인적 자원'의 본질일까? 완벽하게 분석된 이 숫자 속에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지? 나는 무엇을 위해 이 데이터를 파헤치는 걸까?"


그는 종종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대답을 찾기 전에 다음 프로젝트의 복잡한 인재 육성 모델 구축과 마감 기한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의 연구실 책상 한구석에는 덮개에 덮인, 어릴 적 고모가 주셨던 낡은 그림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지나간 유년기의 추억'쯤으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수현 씨에게 예상치 못한 불운이 닥쳤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구축했던 AI 기반 인재 배치 시스템이 대규모 조직 와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데이터는 분명 '최적의 시너지'를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특정 직원의 무리한 재배치와 감정적 교류 부족으로 인해 팀워크가 파괴되고, 핵심 인재들이 대거 이탈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의 완벽한 시스템이 조직에 대규모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완벽하게 분석하고 예측했는데! 이 데이터는 절대 거짓말을 할 리 없어! 내가 놓친 게 뭐지?"


그는 경악했다. 그의 완벽한 예측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모든 프로젝트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클라이언트들의 항의와 직원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그의 화려한 HR 인생이 한순간에 멈춰버린 듯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손에는 남은 것이라곤 수많은 오류 보고서와 함께, 공허함만이 가득한 머릿속뿐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에게 고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은 독립 도서관을 운영하는 고모가 건강 악화로 도서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수현은 늘 “요즘 누가 낡은 종이책을 읽냐”며 고모의 도서관을 비효율적이라 여겼지만, 고모는 “도서관은 사람의 마음을 잇는 곳”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작은 도서관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수현은 휴직계를 내고 무작정 고모의 마을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에게는 고모를 도와야 한다는 막연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망가진 노트북과 수많은 비난 기사만이 들려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웠다.


도착한 고모의 도서관은 낡고 아담했지만, 책 향기와 사람들의 온기가 가득했다. 좁은 공간에는 오래된 나무 책상과 손때 묻은 책들이 놓여 있었다. 고모는 그의 핼쑥해진 모습을 보자마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현아, 너 얼굴이 왜 이렇게 핼쑥해졌니?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마, 네 회사도 힘들다며.”


고모의 따뜻한 말과 손길에 수현 씨는 낯선 위로를 받았다. 굳이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고모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고모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었다.


도서관의 낡은 의자에 앉아, 그는 오랜만에 고요한 안식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을 갉아먹던 자책감과 절망감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했다. 이곳에서라면 혹시 잃어버렸던 자신의 마음을 다시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피어났다.

그날부터 수현 씨는 도서관 안에서만 지낼 수 없었다.


TV를 켜도, 책을 읽어도 그의 마음은 온통 답답함으로 가득했다. 그의 감정은 억눌려진 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어슬렁거리다, 그는 고모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낡은 그림책들을 발견했다.


그는 어릴 적, 고모와 함께 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기억을 떠올렸다. 화려한 데이터 분석은 없었지만, 그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감정을 교류하던 그 순간의 순수한 즐거움. 문득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는 굳이 목적을 두지 않고,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고모의 옆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질문에 당황했다. 데이터로 답할 수 없는 순수한 호기심들. 고도로 계산된 로직 대신, 낡은 그림책이 주는 위로와 행복은 도시의 대형 기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진짜 감각이었다.


그의 온몸의 세포들이 살아나는 듯했다. 이곳에서라면 자신이 잃어버렸던 관계의 의미를 다시 찾고, 마음을 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피어났다.


고모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서툰 솜씨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그에게 고모는 말했다.


“수현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래. 어떤 때는 너무 복잡해서 어떤 데이터로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떤 때는 너무 단순해서 작은 이야기 한 권에도 위로받아. 이 도서관도 마찬가지야. 숫자로 설명할 수 없어도, 누군가에겐 엄청난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중요한 건, 계산으로 관계를 채우려는 게 아니라, 네 마음을 비우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거야. 그 비워진 자리에 진정한 관계가 채워지는 거란다.”


고모의 말은 수현의 마음을 깊이 울렸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화려한 데이터와 완벽한 시스템이 주는 찰나의 성공 대신, 사람의 마음을 비우고 공감하는 과정 자체가 주는 깊은 만족감.


그는 자신이 좇던 '객관적인 진실'이 실제로는 너무나도 차갑고 고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감정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며, 그 속에서 비움과 채움의 관계를 재발견했다.


수현은 그날부터 도서관 일에 온전히 몰두했다. 그는 더 이상 'HR 분석'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에 집중했다. 굳이 복잡한 시장 예측 대신, 손으로 직접 낡은 책들을 수선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며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마을 사람들의 피드백을 들으며, 도서관이 주는 공동체의 유대감과 위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했다. 차가운 분석에서 벗어나 따뜻한 통찰력을 얻어갔다. 그의 마음속에 비움과 채움의 관계가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다.


한 달 후, 수현은 고모의 도서관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했다. 화려한 도시의 HR 전략가 대신, 소박한 도서관에서 그는 삶의 진정한 의미와 사람의 마음을 읽는 통찰력을 배웠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작성한 도서관 활성화 제안서와 함께, 새로운 관점으로 분석한 마을 사람들의 진솔한 피드백들을 들고 투자자들을 찾아갔다. 그의 제안서는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이번에는 성공에 대한 압박 대신, 관계의 가치를 지키려는 용기가 그의 제안서 곳곳에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투자자들이 그의 '비합리적인' 제안에 의아해했다.


“김수현 씨, 이 도서관의 예상 수익률은 시장 분석 데이터로 볼 때 너무 낮습니다. 감성적인 요소만으로는 투자를 유치하기 어렵습니다.”


투자 담당자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수현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물론 이 도서관은 대규모 매출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도서관은 데이터를 넘어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한 명의 아이에게 꿈을 심어주고, 한 명의 어르신에게 위로를 준다면, 그것이 바로 이 도서관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제가 직접 마을 사람들의 피드백을 분석한 결과, 이 도서관은 단순한 책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비우고 채우는 '공동체의 중심'입니다. 이 도서관의 가치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도서관의 진정한 가치를 믿고, 이 공간을 지켜낼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진심과 관계의 가치를 지키려는 용기에 투자자들은 결국 설득되었다. 고모의 도서관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수현이 제안한 도서관 활성화 캠페인은 '데이터 너머의 연결'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시작되었고, 예상치 못하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더 이상 'HR 테크의 선구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잇는 관계 전문가'로 불렸다.


그의 전략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진정한 관계의 의미를 재발견했고, 가장 중요하게는 관계 속에서 비움과 채움의 지혜를 얻었다.


"가장 완벽하고 화려한 시스템과 예측이 자네를 성공으로 이끌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자네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을 걸세. 때로는 모든 숫자의 흐름과 합리적인 분석을 내려놓고, 투박하고 비효율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게나. 그 마음을 비우는 곳에서 자네가 잃어버렸던 진짜 삶의 아름다움,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채우는 진정한 관계를 재발견할 수 있을 테니."


수현 씨는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의 새로운 삶은 여전히 데이터를 다루었지만, 그 위에 사람들의 온기와 진심이 담긴, 살아있는 통찰을 더했다.


그는 매일 아침 차가운 숫자 속에서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를 찾으며 기쁨을 얻었다. 데이터의 숲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마음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의 HR 전략은 이제 '단순한 생산성 증대'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이어주는 관계'를 창조하는 일로 흘러갔다. 그는 마침내 진정한 관계 전문가로 성장했으며, 무엇보다 관계 속에서 비움과 채움의 지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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