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이저리그(MLB)를 즐겨 보는 팬이라면 알겠지만,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리그 챔피언이라 할 수 있는 월드시리즈 우승에 관한 유명한 저주가 있다. 하나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밤비노의 저주', 다른 하나는 시카고 컵스의 '염소의 저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여기서 이야기할 '와후 추장의 저주'이다.
이미 깨진 '밤비노의 저주'나 '염소의 저주'와는 달리 1951년경부터 이어져 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와후 추장의 저주'는 아직 그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라는 팀명에서도 알 수 있듯 구단을 상징하는 '인디언' 로고 디자인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디언 희화화(인종차별) 논란'에서 시작되었다.
바뀐 로고는 기존에 노란색이던 캐릭터의 피부색을 빨간 색으로 바꾸고, 표정 또한 더욱 우스꽝스럽게 바꿈으로써 팬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지만, 동시에 인디언을 희화하한 인종차별적 로고라는 비난에 휩싸였다. 이 논란은 미국의 인디언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바뀐 로고를 다수의 팬들이 좋아하고 있다는 것'과, '인종차별적 의도가 아닌 친근함을 강조한 순수한 의도의 창작물'이라는 점을 들어 유지되어 오고 있었지만, 이 논란이 월드시리즈 우승과 연결된 '와후 추장의 저주'로 이름지어지면서, 인디언 로고 대신 알파벳 'C'로 메인 로고를 변경하였다.
구단 측에서는 이런 논란을 의식한 교체임을 밝혔지만, 일각에서는 인종차별 논란으로 인한 어떤 윤리적 차원의 교체라기보다는 이른바 '와후 추장의 저주'를 깸으로서 단지 우승을 하기 위한 행동의 일환이 아니냐는 의심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고 교체를 발표하면서도 그것이 인종차별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임을 분명히 밝히지 않은 채 단지 '부적절한 로고의 사용'이라고만 밝혔으며, 논란의 인디언 로고는 모자에 박히게 되는 메인 로고로서의 지위만 잃었을 뿐 어깨 패치에 그대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구단의 캐릭터 샵 혹은 경기장 내 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보조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디언 캐릭터의 '완전 퇴출'에 실패해서인지 모르겠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아직도 월드시리즈 우승의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최근 MBC 예능프로그램 '전지적 참견시점' 에서 장애인 비하 논란이 있었다. 내용인즉 영화 '맨발의 기봉이'에서 실존인물 '엄기봉'씨를 연기한 배우 신현준이 함께 출연한 패널들의 요구에 응하여 영화에서 했던 자신의 연기를 우스꽝스럽게 다시 흉내내면서 '장애'를 단지 예능적 웃음의 도구로 소비하며 희화화했다는 것이었다. '전지점 참견 시점' 제작진 측이 공식적인 사과 입장을 표명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개 이런 논란이 있을 때 제작진의 입장 표명은 다음과 같이 전형적이다.
'장애인을 비하할 의도는 없었으며, 상처를 받았을 장애인들과 그 가족 여러분께 사과드린다.'
우리는 앞의 인디언 캐릭터 논란에서도 보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인디언 로고를 최초로 디자인한 디자이너가 대단한 인종차별주의자라거나, 악의적인 인종차별의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장애인 비하 논란 때마다 나오는 장애인을 비하할 의도가 없었다는 제작진의 해명들 또한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느꼈을 불쾌감에 대해서 이제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행위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특정한 행위가 소수자로 하여금 불쾌감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감을 얻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정말 누군가가 불쾌함을 느낄 만한 것인지에 대해 사회적으로 논쟁하고, 그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논쟁의 과정 속에는 행위자의 의도성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그러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적절했는지 아닌지만을 따질 뿐이다.
(사실 '맨발의 기봉이'라는 영화는 개봉된 지 수년이 지났고, 당시 주연배우 신현준뿐만 아니라, 많은 연예인들이 이른바 '개인기'라는 명목으로 장애인 흉내를 내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삼는 이는 장애인계 일부를 제외하곤 많지 않았었는데, 몇 년 사이 논란거리가 된 것을 보니 어떤 면에선 이체롭기도 하다. 지나치게 긍정적인 해석일지 모르지만, 발전적 논쟁의 한 예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이러한 '비하 논쟁'의 양상을 살펴보면 대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위의 기사 제목처럼 소수자 옹호, 이른바 '당사자주의적' 입장과 그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즉 과도한 당사자주의적 입장을 경계하는 입장으로 나뉘게 되는데, 후자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전자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속칭 '프로불편러'라 칭하면서,
다수의 논리를 앞세운다. 쉽게 말해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너희 몇몇에 불과하므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과도한 당사자주의는 소수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만 의지하여 외부의 평가를 일체 거부한 채로, 피해자 개인의 주관적 판단과 감정만으로 상황을 결론짓는 문제가 있다. 다수가 공감하기 어려운 개인의 주관적 판단과 감정의 불편함까지 누군가가 일일이 살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주관적 판단 주체로서의 각각의 소수 개인과, 특정한 상황과 지위, 혹은 특정한 시회적 위치 등을 공유하는 '집단화된 소수'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사실 '비하 논란'같은 일련의 '차별 논의'에 있어서 피해자가 되는 쪽은 대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에서 인종 차별을 받는 외국인, 비장애인 사이에서 비하 등 각종 차별을 당하는 장애인, 미국인들 사이에서 비하를 겪는 소수의 인디언, 모두 소수 집단에 속하지만 차별 논의에 자주 등장하는 집단들이다.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어쩌면 그들이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도 결국 소수이기 때문일 수 있고, 이것은 일련의 비하 논쟁에 있어서 다수의 논리만을 앞세워서는 안되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집단화된 개인이라 할지라도 항상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논쟁의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메갈-워마드 논란'이 그 한 예인데, 이것은 과도한 당사자주의가 집단화된 경우로 보인다.)
사실 그 옛날 '봉숭아 학당'의 '맹구'로 대표되는 '바보 연기'라든가, 역시 오래 전에 유행했던 게그 코너 '시커먼스'와 같은 류의 외모나 피부색을 소재로 한 '분장 개그'는 코미디의 전통적 소재였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1차원적 요소들을 소재로 한 코너들은 사라져 가는 추세이기도 하다.
이러한 코너들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 많은 이들은 그것은 이러이러해서 장애인 비하가 되므로, 또는 이러이러해서 흑인 비하가 되므로 방송에서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장애인이 그 신체적 불편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지는 표정이나 동작 등을 어떠한 고민도 없이 예능적 웃음의 도구로 삼는 것은 잘못되었다' 라는 등의 논리적 근거를 대지 않더라도, 이런 류의 개그 코드들이 사라진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더이상 대중의 웃음을 끌어낼 만큼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분명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웃었던 것들인데 이제 보니 왜 재미가 없을까?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을 분석하거나 평론하는 직업을 가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대중들은 어떤 장면이나 내용에 대한 순간적인 감상이라면 모를까 그리 깊게 고민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비교적 장시간의 논리적 전개와 그에 따른 어느 정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영화나 드라마 장르와 달리 순간적인 웃음을 목적으로 하는 코미디 장르의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부턴가 이 코너들을 보면서 '재미'보다는 '불편함'을 먼저 느낀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김성연 사무국장은 앞의 '기봉이 논란'과 관련한 인터뷰 기사에서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누군가를 비하하고 장애를 웃음거리로 삼는 것을 불편하다고 느낀 것은, 확실히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진 부분이다. 누군가를 놀리면서 웃기는 상황을 만드는 방식이 명확하게 차별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별이나 인권에 대한 고민이 확대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언급했다. 즉 집단적 토론의 결과인지, 개인적 사고에 의한 내면화의 결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른바 '기봉이' 개인기에 대한 반응이 달라진 것은 이러한 고민이 '저런 개그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를 얻어낸 결과이며, 이미 그러한 합의를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상태 (일부는 이것을 '인권 감수성'의 고양으로 설명하기도 한다)라는 것이다.
사실 '기봉이 논란'에서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저 장면을 편집없이 내보낸 제작진이나, 저것을 '개인기'라는 명목으로 재연한 배우 신현준보다, 이러한 방식이 특정한 대상을 비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문제 의식조차 가지지 못했던 사회에 있으며, 그 기저에는 이러한 문제제기를 '소수의 프로불편러' 때문이라며 뭉개 왔던 다수 대중들의 무감각함이 있다.
어떤 것이 비하가 될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물론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편함'을 계속 가지는 것은, 계속해서 말하지만 '앞으로는 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소수의 불편함'을 폄하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참고>
[이현우의 MLB+] 여전히 끝나지 않은 '와후 추장의 저주', 엠스플뉴스. 2018. 02. 02.
전참시 '장애인 희화화' 논란이 남긴 것, 노컷뉴스. 2018. 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