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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모씨 Nov 10. 2020

청년구직활동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취준 일기

https://youthcenter.go.kr/main.do

본 글은 2019년도 05월에 맞춰 작성되었습니다.


시행된다며 젊은 애들이 취직도 안 하는 주제에 돈을 준다며 이러쿵저러쿵 많이 많았던 청년구직활동지원금을 내가 받게 되었다. 사실 정책적으로나 행정적으로나 문제가 없는 제도란 있을 수 없다. 이 정책 또한 이번 정부를 끝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얼마나 내가 구직활동을 열심히 했는지와 상관없이 졸업 후 몇 년이 지났는지가 우선순위로 선발되기 때문이다. 후에는 등록비가 싸고 쉽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디지털 대학교에서 전문 학사 학위를 받은 후 구직 지원금을 받으며 어떻게든 나는 구직활동을 한다며 보고하는 가사노동자들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건강보험료를 일부러 낮추기 위해서 갖은 편법을 쓰는 사람이 나올 수 있으며,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으므로 내가 무슨 구직 활동 계획서를 작성하든 졸업을 언제 했는지의 순서대로 선발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청년 구직자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


그렇지만 일단 무직인 상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에 상응하는 포인트)이 지급되니, 졸업 후 장기간 취업 준비를 하면서 부모님에게 손 벌리기가 죄송하기만 했던 취준생들에겐 정말이지 단비 같은 제도이다. 본인도 일하다가 그만두고 지원금을 받는 중인데, 사실 학부생 때부터 모아둔 돈이 있어 생활 자체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한 번에 8만 원 가까이나 하는 OPIc 시험을 접수하지 못했다. TOEIC 시험을 접수하면서도 벌써 5만 원이나 썼다는 슬픔이 나를 압도했다. 아무리 '요즘 애들이 제가 뭐가 되는 줄 알아서 배가 불렀네!' '부모님 등을 처먹으라' 해도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다. (청년활동구직지원금을 받을 대상이 되는 형편 대부분의 사람들에 한해서 하는 이야기다) 의식주와 같은 생리적(physiological)인 욕구, 결핍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은 매슬로의 욕구 단계에서 볼 수 있듯이, 가장 하위적인 욕구를 해결하게 도와준다. 결핍적인 욕구가 해결되어야, 사람들은 성장 욕구를 느끼는 법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면,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구직활동에 전념하게 해주는 제도라고도 할 수 있다.

4월에 정말 열심히 활동 계획서를 작성했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아서 정보이용 동의를 못 하면서 이게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는 부모님을 뒀기에, 직접 본가에 내려가 동의서를 출력해서 사인을 받고, 신분증 사본을 스캔해서 (요즘은 스캔 앱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앱으로 하면 된다) 등록하고, 세부사항을 열심히 작성했다. 나중에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보면서 "어차피 졸업 연도로 판정 되는 거라서 그렇게 열심히 쓸 필요 없다."라는 글을 봤고 실제로 교육을 들으러 가서도 "계획서를 자세하게 적어준 분도 계시고 진짜 어떻게 취직하려나 싶을 정도로 쓴 분들도 계시는데…." 와 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어쨌든 나는 최대한 자세하게 적었다. 내 처지를 알리고 나중에 보고서 작성 시에 내 처지를 참작해주지 않으실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구직활동지원금을 굳이 내가 받고 싶었던 이유는 병원비와 각종 시험 접수비 때문이었다. (의식주도 물론 포함이지만, 그건 그전에도 사비로 잘해냈으니까) 병원비가 거의 한 달에 적어도 8만 원이 나왔다. 한 달에 식비로 쓰는 장 보는 비용이 4만 원이 넘어가질 않는데 8만 원은 나에게 큰돈이다. 나는 병원에 다니면서 내 상태가 나아져야 회사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구직활동에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 불안하고 우울한 정신상태로는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데, 나라에선 일을 구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이게 지금까지의 현실인가 싶기도 하고, 되려 내 정신건강상태를 노동청(더불어 나라, 근데 이미 건강보험공단은 알고있잖아)에 알리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노동청에서 노동자, 구직자, 고용주들의 정신건강 상태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어도 괜찮은가? 라는 의문도 지나갔다.


사담은 이쯤하고, 어쨌든 해당 지역 담당 고용센터에서 보고서를 받아보고 다음 달 포인트 지급을 결정하는데, 병원비는 안 된다고 하니….  하지만 "보고서에는 포인트를 사용해서 직, 간접적인 구직을 했다. 라는 내용을 적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는 온청센에 직접 문의한 결과이다) 내가 어디에 포인트를 쓰든 간에 내가 직, 간접적인 구직 활동을 했다는 것을 보고서에 기재하면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기 제일 쉬운 게 독서실 영수증, 학원비 영수증, 도서 구매한 영수증, 수험 접수비, 면접 보러 갈 때 썼던 교통비 등등일 뿐인 것이다.


지원금은 현금이 아닌 포인트로 지급되기 때문에 1일에 당황하지 말고 보유 포인트를 조회해서 확인할 수 있다. 6월 1일이 토요일이었음에도 지원금 50만 원이 지급되었다는 안내문자가 왔다. (오전 9시경) MMS 문자로 오니 데이터를 켜두는 것을 추천한다. 포인트 사용 후에는 승인 관련 문자가 오고, 잔액이 얼마인지도 친절하게 알려준다.


포인트를 받고 가장 처음 한 것은 병원방문이었다. 백수인 주제에 일부러 토요일에 갔다. 6월 1일이 토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병원비 11,600원을 포인트로 결제했다. 나중에 월말에 내가 어디에 썼는지 담당 고용센터에서 다 받아보겠지만, 보고서에는 보고 하지 않아도 되니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또 노트북 수리를 맡긴 것을 찾아왔다. 거기에서 20만 원이나 써버렸다. 노트북 수리를 보고서에 올려도 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담당 센터 재량이라고 한다. 또 쿠팡에서 음식재료를 주문했다. 비싸서 자취를 6년이나 하면서 한 번도 사서 먹어 본 적 없고 평소에 집에서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들을 사봤다. 포기김치 1킬로를 주문했다. 시리얼도 샀다. 제일 싼 딸기잼 말고 사과잼을 사봤다. 사실 이래도 3만 원이 안 넘어갔지만, 기분이 참 좋았다.


돈을 벌면서도 못사서 먹어봤던 것들이었다. 전문직이었기에 내가 벌었던 돈이 일반적인 대졸 초임치고 적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사서 먹질 못했다. 나중에는 아예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애초에 뭔가 해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5월 셋째 주부터 떡볶이가 정말 먹고 싶었는데 6월까지 꾹 참았다. 포인트로 먹으려고! 근데 병원비랑  노트북수리를 하고 시험접수까지 하려고 하니 덜컥 너무 펑펑 쓰고 다니는 나 자신이 겁나서 떡볶이는 내 돈 주고 사서 먹었다. 나라에서 돈 50만 원씩을 줘도 나는 돈이 무섭다. 자유경제 사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와 존 스튜어드 밀은 무덤에서 엉엉 울고 있을 것이다. 케인스도 울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이기 전에 애초에 소비자가 되질 못 하고 있다. 모아둔 돈 저승 가는 길 노잣돈으로 쓸 것도 아니면서. 다시 한 번 내가 조금 한심하다.


교육을 받는 도중 노동청 담당자가 "나라에서 이렇게 돈 주는 거 여러분 정규직 취직하라고 주는 거니까 10개월짜리 계약직 같은 거 말 정규직 취직하세요." 라고 했다. 나는 전공 특성상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저들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수혜자이며 그런데도 세금으로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이 내 양심을 아프게 한다. 그래서 정규직 자리에 열심히 이력서를 넣고 있다. 자기소개서는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나는 기업과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고,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섭다. 혁신적이기보단 그냥 안정적인 상태를 찾아 그 자리에서 안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렇게 키보드 앞에 앉아있는 거고. 예전에는 그래도 사랑 많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대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올해 2월 말즈음 부터 다시 일을 시작해보라고 했던 담당의도 3월 초순부터 악화되는 내 증세에 일하러 가라는 말이 쏙들어갔다. 아빠는 정규직으로 일 못하는 전문직인 나를 보고 '아픈손가락' 이라고 했고 개인사업장에 취직했을 때 '되지도 않는 데에서 일을 한다' 라고 했다. 그러면 대학은 왜 보냈을까? 그래 등록금은 0원이었고 한학기에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책값은 다 내가 과외해서 냈지. 어디까지 내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야 하는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왜 노동을하며 재화를 벌고 소비해야 하는걸까? 나는 단 한번도 내 인생에 대한 미련을 가져본적도, 살고싶은 욕망를 가져본적도 없는데.


이력서는 족족 떨어지고 있고 (퇴사사유에 그냥 일신상의 사유라고 적은 게 큰 것 같다. 죽고 싶어서요. 라고 적을 수는 없지 않은가? 쓸데없는 자존심일지도 모르지만, 각종 미사여구를 붙이기가 싫었다) 이 점들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다. 서류 합격이 될 거로 생각했던 회사에서 얼마 전에 탈락했다. 내 학력과 내 자격과 각종 증명이 있어도 나는 회사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나를 좀먹는다.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온갖 긍정적이고 self-esteem 스러운 말들을 적어서 다른 곳에 이력서를 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인간의 삶에서 실존조차 못 하는 사람이 될까 봐. 그래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어야 후에 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길 것 같지 않아서. 어찌 됐든 어떻게든 뭔가 해보고자 하고 있다.


포인트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바로 다음 날, OPIc 시험을 접수했다. 접수하고 공부를 하는 중인데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의 뺨을 좌우로 후려치고 싶어질 정도로 자괴감이 든다. script를 외워야 하는구나. 이런 시험이구나 라는 것을 지금 5일째 느끼고 있으며, 정신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그래도 이왕 접수한 OPIc, AL은 받아야지 하며 공부하고 있고, 그 잘난 정규직 자리를 얻어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나는 기업에서 원하고 나라에서 기꺼이 세금을 내주어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지원금이 나의 양심에 못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장은 비싼 수험료를 내게 해주어서,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어서, 병원에 다닐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7일밖에 안 됐지만)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은 나보다 더 생산적이며 본인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좀 더 높이 평가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만약 지원금을 받게 되신다면, 나보다 좀 더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쓰실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곳에 취직하는 것 보다, 좀 더 행복하게 지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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