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WORK LIFE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모씨 Nov 11. 2020

우울증 환자의 직장 구하기 대여정

우울증 공황장애 환자의 직장 일기

내가 처음 일한 곳은 계약직이었다. 나는 전문직이기 때문에,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크게 상관이 없었고 잘 배울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뒤 일을 시작했다. 사실 학업을 더 이어나갈 수도 있었으나 학부 때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기 때문에 공부를 더 하기가 싫었다. 그리고 학위를 취득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좁아진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에 곧바로 취직을 했다.


첫 직장 생활은 지방에서 시작했다. 수도권에 가면 더 많이 배울 수 있겠지만, 수도권에서 생활할 여력이 나에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충분히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첫 직장에서 얻은 건 더 심해진 우울증과 수면장애였다. 매일매일 울면서 잠들고 울면서 일어났다. 휴대폰 알림이 울리는 게 너무 무서워서 쳐다보질 못했다.

처음 일을 하는 나에게 아무도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고, 너무나 바빴던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한 지 한 달이 채 안되어서 본업에 투입됐다. 고객들은 나이가 어린 나를 믿지 않았고, 컴플레인이 곧잘 걸려왔다. 밖에서는 빨리 해결을 하라고 모두가 아우성이었는데,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더해서 직장 내에서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을 탓할 수도 있겠고 내가 들었던 말들과 괄시를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올바른 생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거기에 교대근무가 겹치면서 체력적인 한계를 느꼈고, 결국엔 뻥 하고 터져서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 삼 개월 동안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며 지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기력이 다 빠져 나 자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런데 집에 가기는 싫었다. 일을 시작하면서 큰 스트레스 중 하나는 가족들의 무시였기 때문이다. 나보고 가짜 의사라고 했고, 병원놀이를 한다고 했다. (추후에 이게 무시한 게 아니라 관심의 표현이라고 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사무관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학부생 때 장학금 때문에 사무관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1차 시험은 잘 준비할 수 있으니까, 2차 시험을 잘 준비하면 나도 5급 공무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공부를 시작하면서 큰 문제가 발생했다. 손이 벌벌 떨리고 글이 읽히지 않았다. 짧은 글은 읽을 수 있었는데, 문단이 읽히지가 않았다. 나는 항상 언어영역(지금은 국어다.) 점수가 좋았고, 고등학교 때 시험을 치면 언어영억은 20분 안에 다 풀어버릴 정도로 읽는 속도도 제법 빠른 편이었다. 내가 잘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는데, 글이 읽히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다 긴장을 하면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우친 나는 그제야 우울증 치료를 결심하고 병원을 방문했다. 우울증이 있다는 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깐.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심각할 정도로 오래된 환자가 내원한 경우는 잘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내 치료는 시작됐다.


치료를 위해서 가족들에겐 사무관 준비를 핑계로 계속해서 지방에 머물렀다. 치료를 하면서 공황발작이 시작됐고, 내 취직은 점점 더 늦춰졌다. 애초에 사무관은 진작에 포기했다. 부모님은 1년 만에 합격하라고 하셨고, 2차 시험 첨삭을 위해서 서울에 머물러야 하는데, 거기에 여비를 마련해주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 혼자 공부를 할 순 있었지만, 서울 생활에다 치료까지 하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빠르게 포기했다.

여러 기업에 지원했고, 면접도 봤지만, 낙방을 여러 번 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그러다가 지금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됐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에 취직을 했지? 싶다. 일한 지 일 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내정된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면접을 너무 못 봐서 내가 붙었다. 다들 경력직이었는데, 나만 아니었는데, 내가 붙었다. 어쩌다가 붙었는지 아직도 신기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매우 만족하고 있다. 여건도 이만하면 만족하고, 같이 일하는 사람도 좋고, 내가 하는 일도 좋다. 치료를 받으면서 마음이 많이 가벼워지고 아량이 넓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만족하고 있으니 됐다. 사실 돈을 더 잘, 많이 벌 수 있는 길이 있지만 '이만하면 됐다.'라고 생각한다. 매주 월요일에 퇴근하고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신기한 사실은, 내 여건이 나아지면서 나의 질병도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 내가 아무리 잘 지내도 날 둘러싼 환경은 그대로이고, 내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잘 지내는 와중에 안 좋아지는 날들이 섞였고, 나는 너무 불안했다. 이제야 정상 사람처럼 지내는 거 같은데 또 나빠지면 어떻게 하지. 또 잘 못지 내면 어떻게 하지.


그 이야기를 했더니, 병원에서는 기분의 사이클이 있는데, 그 사이클의 크기를 줄여나가는데 의의를 두자고 하셨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 하루하루 다니며 나름대로 잘 버텨나가고 있는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청년구직활동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