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공황장애 치료일지 11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다. 집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항상 괜히 왔다고 느낀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집에 다녀왔는데 정말 후회했다. 가족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복잡하다.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그들이 불쌍하기도 하다. 어차피 나에게 채워진 족쇄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잘해주려고 한다. 무거운 짐이 주렁주렁 매달린 내 발목이 불쌍해서다.
작년에 돈 때문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아 가족들 연락처를 모두 차단하고 연락을 받지 않았던 적이 있다. 정말 편하고 좋았었다. 가족들이 좋은 집으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주택공사에서 보급하는 집이었다. 그 집은 10년 동안 월세를 주면서 산 뒤에 그 뒤에 분양을 받는 식이었는데, 10년 뒤에 집을 분양받을 능력이 없으니 하루빨리 취직해서 돈을 좀 '달라'라고 했다. 돈을 '달라' 고 한 이유는 엄마가 아빠한테 시집와서 너무 고생했으니까. 였다. 언니까지 합세해서 '부모님이 부탁하는 게 그렇게 싫냐' 고 했고, 나는 연락을 모조리 끊었었다.
내가 돈을 못주는 사람도 아니고, 못 버는 사람도 아닌데 '가짜 의사' 라며 날 무시해놓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빨리 취직해서 돈 벌어 와라고 했던 게 철면피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게 아니라'라고 했고, 정신병은 나에게 있는 거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겠거니 하고 말았다. 어쩌다가 다시 집에 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집에 한두 달에 한 번씩 간다.
그러고 나서도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다. 아빠는 나보고 돈을 못 번다고 했고, 엄마 임플란트 비용을 내라고 했다. 추석 때는 친척들한테 돌릴 선물세트를 사내 놔라고 했다. 그랬는데도 나는 집에 또 방문했다. 결혼식도 가야 했고, 차를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들 날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은 날 보고 싶어 한다. 이번엔 또 어떻게 날 괴롭힐지 걱정하며 집에 내려갔다. 혹여 뒷말이 나올까 봐 카드도 챙기고, 먹을 것도 챙겨서 집에 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내가 새로 차를 샀는데, 할부가 끝나면 차를 달라고 했고, 부모님을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넣어서 나보고 부모님 건강보험료를 내라고 했을뿐더러, 언니 것 까지 내라고 했다. (언니는 만 30세가 넘어서 피부양자 조건이 안되어 못 넣는다고 했다.) 본인들 노후 준비가 안되어 있어 걱정이라고 했고, 언니 공부하게 내 아이패드를 언니한테 주고 가라고 했다. 엄마 임플란트 하게 내 카드를 달라고 했고, 신을 신발 한 켤레가 없다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와서 아빠가 술 먹느라 버린 십수 년의 세월 때문에 우리가 너무 힘들다고 했다. 더해서 내 가방을 뒤적여 내 약을 찾아냈고, 나는 비염 약이라고 둘러대야만 했다. 취침 전이라고 적힌 이유는 비염약이 졸려서 자기 전에 먹어야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신경쇠약이 걸릴 것 같았다. 공황발작이 찾아왔고, 숨쉬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21층인데 창문 난간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떨어져 죽는 게 별 거 아닌 거 같았다. 내가 죽고 나면 좀 나아질까?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놀이터를 보면서 그냥 떨어질까 말까 고민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발목에 차인 족쇄가 없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날 보고 싶어 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그들이 싫었다. 내 눈엔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 날 물어뜯고 싶은 피라니아로 보였다.
주말이 지나고 다시 내 집으로 돌아온 뒤, 곰곰이 생각했다. 천륜으로 이어진 그들을 난 가족으로 부를 수 있을까?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적이 없다. 나는 살고 싶어서 살아본 적이 없다. 나에게 생명을 부여해놓고 날 이렇게 키운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가족이란 무슨 의미일까?
병원에 가서 이야기를 했다. 집에만 가면 상태가 안 좋아지고 그냥 죽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본가에서 나오는 순간 증세는 기적처럼 나아진다고, 본가만 가면 너무 안 좋다고 했다. 집에 자주 안 가시면 되는 일 아니냐고 하셨다. 그러기엔 그들은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곤란하다고 했다.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는 중인데, 마음대로 잘 안된다고 했다. 휘둘리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다행이라고 하시곤 대화가 끝났다.
저번 주에 본가에 들렀을 때 어머니께 내 체크카드를 드렸다. 연말 정산할 때, 내 이름으로 지출이 잡히는 게 좋을 거 같다 하셔서 돈이 조금 들어있는 카드를 한 장 드렸다. 체크카드이니 돈을 넣어쓰시면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돈은 안 넣으시고 쓰기만 하시다가 돈이 모자란다는 문자가 왔다. 어디 허투루 쓰시는 건 아니다. 병원에 다녀오셨고, 장도 봐오셨고, 하루 먹고 하루 사는 게 벅차서 내 카드를 쓰셨을 거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은데 발목이 자꾸만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사회에 갓 진출한 나에게 자꾸만 손을 벌리는 그들이 나를 물어뜯는 것 같다. 언제쯤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결혼을 빨리 해버려야 할까? 아니면 엄마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네들이 죽고 나면 나는 과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